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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hyang Eun Aug 29. 2019

창백한 푸른 점

매체 커리큘럼(M.C)과 인류세(anthropocene)

김한민 작가가 <아무튼, 비건>이라는 책에서 언급한 매체 커리큘럼(Media Curriculum)을 경험하고 있다. 관심을 갖게 된 주제에 대한 이야기나 언급, 은유가 전보다 더 자주 눈에 띈다.


김한민 <아무튼, 비건> | 위고


며칠 전, 스쿼시 가는 길에 이런 대화를 들었다.

“얼마나 만났어?”
“한 달 정도.”
“그럼 한 달 동안 풀만 먹은 거야?”
“응.”
“다른 건 안 먹고 풀만?”
“응. 근데 오래 안 만났어. 한 달에서 한 달 반 정도.”
“불행 중 다행이었네.”

무엇이 불행이고 무엇이 다행인 걸까. 누구에게 불행이고 누구에게 다행이지.




화요일엔 회사에서 <지구 관점에서 보는 우리 feat. 인류세>라는 제목의 강연을 들었다. 과학기술학자 홍성욱 교수의 강연이었는데, 처음 ‘인류세’라는 단어를 봤을 때는 Human Tax의 의미일 거라고 생각했다. (무식하면 용감하고 또 창조적일 수도 있..)

인류가 지구에 미치는 거대한 영향을 고려하면 우리는 지구에 세금을 내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거 그럴듯한 개념이군, 하고 혼자 생각했다. 그러나 ‘인류세’라는 건 새로운 지질시대를 지칭하는 개념이었다. 파울 크뤼천(Paul Jozef Crutzen)이라는 네덜란드 출신 대기 화학자가 2,000년에 처음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용어를 제안했다고 한다.


인류의 자연환경 파괴로 인해 지구의 환경체계는 급격하게 변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지구환경과 맞서 싸우게 된 시대를 뜻한다. 시대 순으로는 신생대 제4기의 홍적세와 지질시대 최후의 시대이자 현세인 충적세에 이은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류세 [Anthropocene, 人類世] (두산백과)


비록 ‘인류세’라는 단어를 잘못 알고 신청한 강연이지만 홍성욱 교수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내가 들을 거라고 생각한 이야기와 결이 같았다.

강연은 최초의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1호와 최초의 기상위성 타이로스 1호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간’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에선 최근에 읽었던 <NOW 시간의 물리학>(리처드 뮬러 | 바다출판사), 재밌게 봤던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다크(Dark)>가 떠올라서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인연이 있는 것처럼 관심사와 관심사 사이에도 인연이나 연결고리라는 게 정말 있는 것 같았다. 과거에도 이런 경험을 적잖게 했지만 김한민 작가가 ‘매체 커리큘럼’이라고 이름 붙여준 걸 읽은 덕분에 그 기묘한 경험을 이제는 한 마디로 부를 수 있게 됐다.

홍성욱 교수는 우주를 찍었거나 우주에서 찍은 몇 장의 사진도 함께 보여줬는데 그중 하나는 Velvet Underground의 <Pale Blue Eyes> 멜로디를 떠오르게 하는, <Pale Blue Dot/창백한 푸른 점>이었다. 우주에서 지구란 수많은 행성 중 하나일 뿐이고, 우리는 그 작은 지구 안에 사는 더 작은 존재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해 준 한 장의 중요한 사진을 보여줬다.


사진출처 https://medium.com/@KeithDB/the-pale-blue-dot-by-carl-sagan-c5cf8f7b4297


이어지는 강연은 우리 인간이 얼마나 지구를 많이 변화시키고 있는지, 그 변화가 지구에서 지금처럼 살 수 있는 시간을 얼마나 단축시키고 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이후의 기록은, 강연을 들으며 받아 적은 것이라 내용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일만 년 전 지구 상의 동물 99%가 야생동물, 1%가 사람이었다면, 지금은 사람과 가축이 97%를 차지하고 야생동물은 겨우 3%밖에 안 된다고 한다. 사람 무게의 합과 소 무게의 합은 거의 비슷한 정도로 지구에 존재하는 동물 질량의 1, 2위를 다투는 게 사람이 됐다는 이야기가 흥미롭기도 하면서, 우리가 이렇게까지 개체수와 무게를 늘려가는 게 다른 모든 걸 떠나 지구에, 지구에 살고 있는 다른 동물과 식물에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해보게 되는 지점이었다.

사람과 가축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늘어 지금 세계 인구는 77억에 이르는데, 지구에서 모두가 골고루 먹고사는 것이 가능한 인구는 80억 정도로 평가된다고 하니 이미 한계에 거의 다다른 셈이다. 만약 모든 사람이 평균적인 미국인처럼 산다면 적정인구수는 딱 18만 명 정도에 불과할 거라는 주장을 하는 학자도 있다.

또 충격적이었던 이야기(는 너무 많았지만) 중 하나가, 사람들이 일 년 동안 먹어치우는 닭이 무려 650억 마리에 이른다는 것. 이렇게 계속 먹는다면 몇 만 년 후 미래 세대가 지층을 파헤쳤을 때 나오는 것은 닭뼈가 대부분일 거라면서 닭뼈가 하나의 지층을 형성할 정도로 사람들이 닭을 많이 먹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불과 얼마 전까지는 나도 닭뼈 양산에 상당히 기여해왔다.

이후로 기후변화가 미치는 영향, 우리에게 남은 물과 에너지와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우리가 과도하게 먹어치우는 가축들, 별생각 없이 쓰고 버리는 물과 쓰레기가 지구에서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을 얼마나 단축시키고 있는지, 그 남아있는 날들이 얼마나 끔찍하고 고통스러울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강연장은 추울 정도로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고 있었고, 불을 끄지 않아도 보이는 프로젝트로 강연 내용이 소개되고 있었는데, 홍성욱 교수는 이렇게 에너지를 쓸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요즘 회사뿐만 아니라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마다 이렇게 추울 정도로까지 에어컨을 켤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내가 더위를 많이 안 타는 편이긴 하지만 나는 앞으로 반팔티셔츠 입을 일이 별로 없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날 강연장에 빈자리가 많아서 안타까웠다.


창백하고 푸른 것은, 그 점만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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