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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hyang Eun Jan 13. 2020

Bon Iver, 광활한 겨울의 음악

2020.1.12. 7pm. Yes24 라이브홀

Bon Iver 내한공연을 보고 왔다. 이번이 두 번째 내한인데, 첫 번째는 4년 전이었다는 걸 다른 사람들의 포스팅을 보고 알았다. 좋았다는 두루뭉술한 기억 외에는 같이 간 사람도 구체적인 인상도 남아있질 않은 게 좀 아쉬워서, 그리고 이번에는, 아직 기억하기 때문인지 어쩐지 첫 번째보다 더 좋았던 것 같아서 기록을 남겨보자고 생각했다.


Bon Iver는 좋은 겨울이라는 의미의 Bon Hiver라는 프랑스어에서 가져온 이름인데, 본 아이버/본 이베르/본 이베어 등 다양한 발음으로 읽힌다. 나는 본 이베어라고 부르는 게 익숙하다. 그렇게 부르기 때문인지 자꾸 곰이 연상되기도 하는데 그 이미지가 저스틴 버논과도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공연은 주로 신곡으로 구성된, 멤버들이 모두 화장실 다녀오기 전의 1부와 1집~3집까지의 알려진 곡 위주로 구성된, 멤버 모두가 화장실을 다녀온 후의 2부로 거의 2시간 정도 진행됐다.



1부 공연 때는 신곡이라 잘 모르는 곡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무대에서는 모두 여섯 명의 멤버가 각자 기타, 드럼, 베이스, 색소폰, 건반 등을 연주했는데 한 사람 당 최소한 두 가지 이상의 악기를 다뤘다. 무대 양옆에는 여러 대의 기타를 조율하다가 때에 맞춰 멤버들에게 건네는 스태프들이 있었고, 곡 중간에 기타를 바꾸기도 했다. 거의 모든 멤버가 목소리를 보태 화음을 쌓아 올렸고, 드럼이 두 대였기 때문에 뭔가 가슴을 가득 채우는 소리가 나서 너무 좋았다.



특히 드럼 두 대가 다 연주될 때면 북소리가 스테레오로 꽈광꽈광 할 때마다 심장도 같이 꽈광꽈광 뛰었다. 드러머 두 사람이 서로 쳐다보면서 혹은 쳐다보지 않고도 소리를 합치고 쌓아 올리는 과정과 결과물을 현장에서 한꺼번에 눈으로 보면서 음악을 듣는 일이 말 그대로 가슴 벅찼다.



저스틴 버논이 노래가 불안한 부분이 있었지만 특히 본 이베어의 공연에서 목소리는 여러 악기의 일부분이므로 전체의 조화 안에서 그 정도는 상쇄할 만큼 풍성한 연주와 소리였다. 전체를 만들고, 때로는 비우면서 쌓아가는 구성이 너무 좋아서 단 한순간도 느슨해질 틈이 없었다.



땅이 넓은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예술가들의 음악은 확실히 작고 비좁고 복잡한 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음악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 이베어는 어떤 멜로디를 연주하면 급하게 다음 멜로디를 잇는 게 아니라, 한 음 한 음이 각각 자기의 소리를 충분히 내고, 그 음과 음이 모여 멜로디가 되어 리듬을 타고 충분히 뻗어나갈 수 있도록 시간을 준다. 각각이 충분히 자기의 소리를 냈다고 생각됐을 때 그다음 멜로디와 리듬을 데려오는 방식으로 음악을 만들고 연주한다.


음악에서 어떤 광활함을 느끼는 건 시규어 로스의 음악이나 라이브를 볼 때도 그랬다. 자기를 둘러싼 환경에 따라 낼 수 있는 소리와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떤 음악적인 구조가 다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물론 그 모든 걸 뛰어넘는 사람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태어난 곳에 따라 어떤 공통적인 기질이나 성격 같은 걸 타고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밴드다.



이미 소리를 낸 한 음절 한 음절을 이미 보내버리고 잊는 게 아니라, 그 앞의, 또 그 앞의, 더 앞의, 그보다 더 앞에 자기들이 연주한 소리까지도 끝까지 데리고 가며 끌어안는 듯한 음악. 그래서 본 이베어 음악을 들으면 자꾸 겨울이 느껴지는 거 아닌가 싶다. 겨울은 비어 있는 것 같지만, 어느 정도 비워냈기 때문에 더 멀리까지 시야에 담을 수 있기도 하니까.



오늘 공연은 같이 보러 가기로 한 친구가 해외 출장으로 오지 못해 혼자 보러 갔다. 무려 스탠딩 11번을 예매해놓고도 왠지 혼자 가서 오래 기다리기 싫어 공연 20분 전쯤 공연장에 도착했다. 시작하기를 기다리면서 읽으려고 아주 얇고 유쾌한 책 한 권을 가져갔다. 이후북스 두 사장님들의 동업 이야기를 다룬 책방 일기 <<우리 기쁜 책방에서>>라는 책이었는데, 공연 시작 전과 break time 동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너무 재미있게 읽었다. 유쾌한 나머지 혼자 왔다는 기분도 잊을 수 있었다.



처음 자리잡은 곳에선 사람들에 가려서 무대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뒷모습 사이사이를 요리조리 움직여야 전체 무대 구성을 하나로 이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음원으로 듣는 거와 차원이 다른 소리에 이거 듣는 게 공연의 매력이지 뭐 하며 내가 리듬 탈 때마다, 혹은 앞에 선 사람들이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다르게 보이는 무대를 찔끔찔끔 보는 것에 만족했다.


그러다 1부와 2부 사이 휴식 시간 동안 사람이 빠져나간 틈을 타서 비교적 앞사람 키가 작은 공간으로 갈 수 있었다. 그때부턴 확실히 무대가 잘 보여서, 그래, 라이브란 이런 맛이지. 연주하는 사람들의 몸짓, 표정, 그들이 무대에서 나누는 교감 같은 걸 같이 봐야 그게 라이브의 묘미지, 1부 때의 자기 위안 같은 건 싹 갖다 버리고 공연에 더 몰입할 수 있어서 더 좋았다.



이건 공연이 끝나고 나오다가 들은 얘기인데, 저스틴 버논은 한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자살을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다 Skinny Love가 주목받으며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됐다고. 공연이 끝나고 몇 번이나 여러 각도로 인사를 전하고 다소 민망해하는 걸음으로 들어가던 저스틴 버논의 뒷모습이 괜히 떠올랐다. 공연 끝나고 나오면서 사람들이 공연 열기를 그대로 품은 채 하는 이야기들 듣는 것도 라이브 공연을 보러 가는 묘미 중 하나고.



두 시간 넘도록 서 있었더니 최근에 아팠던 허리가 다시 아파왔다. 그대로 버스를 타고 집에 오면 허리가 더 아플 것만 같아서 Yes24 라이브홀에서 강변역까지 30분 조금 넘게 걸었다. 중간에 빠져야 하는 데서 빠지지 못해 (역시!) 조금 돌아가느라 시간이 더 걸렸다. 동행이 있을 땐 함께 열띤 후기를 나누는데, 오늘같이 혼자 다녀올 때는 한 걸음씩 걸으며 찬 바람 속에서 공연의 열기를 차분히 빼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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