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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hyang Eun Jan 07. 2020

"무서워."

하지 말았어야 할 말 02

   한번은 매운탕을 먹다가 실수로 어느 생선의 눈알을 씹었다. 눈알은 비비탄 총알 같았다.


   초등학교 때 눈알이 비비탄 총알 같던 남자애가 있었다. 그 아이의 집은 공업고등학교 담벼락을 낀 골목길에 있었다. 따로 대문도 없이, 네 짝의 커다란 유리문의 가운뎃문을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밀면 곧바로 씻는 곳이 나오는, 골목에 아주 면해 있는, 면해 있어도 너무 면해 있는 그런 집이었다.


   사연은 모르지만 그 애의 한쪽 눈엔 검은자위가 없었다. 사연을 몰랐기 때문이겠지만, 그 애가 정말 무서웠다. 그 애는 골목을 지나갈 때마다 대문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자기 집 문 앞에 비비탄이 든 총을 들고 서서 지나가는 사람을 겨눴다. 한번은 그 골목을 지나는데, 친구와 함께 총을 들고 집 앞에 서 있던 그 애가 내게 총을 겨눈 채 빵! 하는 소리를 냈다.


   나는 너무 놀라 냅다 뛰었고 마침 그 근처에 있던 개가 짖으며 뒤따라 왔다. 내가 멈추지 않으면 개도 멈추지 않을 걸 알면서도, 내가 개보다 더 빨리 뛰지 못할 걸 알면서도, 나는 멈출 수 없었다. 멈추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기보다는 그저 달리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아니 그냥 너무 무서워서, 멈출 수 없었다. 어엉어엉 우는 바람에 금세 속도가 떨어졌지만, 개도 나만큼 속도를 늦춰서 딱 서너 걸음 간격을 유지하며 끝까지 쫓아왔다. 차라리 나를 앞질렀다면 어쩔 수 없이 멈췄을 텐데 딱 그만큼 거리를 유지하며 끝까지 쫓아오는 바람에, 나는 다리가 풀릴 때까지 뛰다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알이 이 사이에서 감지되었을 때, 매운탕에 들어있을 법한 모양과 식감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두어 번 씹다가 놀라서 상 위에 퉤! 하고 뱉었다. 새하얀 눈알이 두어 바퀴 구르다 멈췄다. 이로 구형을 망가뜨리는 바람에 멀리 구르진 못했다. 매운탕거리만 따로 주문해 끓인 거라 어떤 생선의 눈알인지도 알 수 없는 눈알은 생각보다 작았다. 비비탄 총알처럼.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 애가 실제로 내게 총알을 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 애는 어쩌다 까만자위를 잃은 것일까.


   다리에 힘이 풀려 막상 주저앉았을 때 개는 더 이상 짖지 않고 나를 맹렬히 쫓아왔던 그 길을 되돌아 유유히 가버렸다. 엉엉 우는 나를 잠시 어떤 눈길로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그 일 이후 이십 년이 넘도록 개를 만지지 못했다. 귀뚜라미도 무섭지 않고 벌레도 곧잘 잡았으나 개는 도저히 만질 수가 없었다. 개를 키우는 친구 집에는 가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가야 할 때는 친구가 개를 잡고 있는 틈을 타 후다닥 뛰어서 친구 방으로 쏙 들어갔다.


   성인이 된 후 언젠가부터, 개나 고양이가 굉장히 중요해졌다. 아무도 개나 고양이를 무서워하지 않고, 개나 고양이를 무서워하면 뭐가 무섭냐고, 네가 더 무섭다고 농담하는 사람도 있었다. 개나 고양이, 남들이 키우기도 하고 대체로 예뻐하는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마치 인간성의 아주 중요한 구성요소가 결여된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얼마간은 개가 무섭다는 말을 하기가 무서워져서, 무섭지 않은 척했다. 무섭지 않은 척만으로는 부족해서 슬쩍 손을 대보는 시도도 하게 됐다.


   그랬더니 조금씩 그 촉감에 익숙해졌다. 털은 보드라웠고, 대부분의 개나 고양이는 만지는 것만으로 사람을 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혀로 핥는 느낌이나, 남들은 젤리라고 말하는, 미끌미끌할 것만 같은 발바닥이나 코 같은 곳으로는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여전히 무서웠다. 아직 만져보지 못한 것을 만졌을 때 내가 느끼게 될 이질적인 촉감이 만져보지도 않고, 만져보지 않았기 때문에 무서웠다.


   "무서워."


   그렇게 말하면 무서워하지 않는 친구들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하거나, 뭐가 무섭냐고 하나도 무섭지 않다고 말해주거나 했다. 하지만 어떤 친구도 그 이상을 강요하진 않았던 것 같다.


   지금은 개나 고양이의 손바닥이나 코 같은 곳을 살짝 만지고, 가끔 강아지가 내 손을 핥거나 살짝 무는 것도 무섭지 않다. 삼십 년 가까이 무서워하며 살아온 내게는 나름대로 크다면 큰 변화인데 이런 변화들은 무섭지 않다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믿은 데서 시작된 것 같다. 아니, 이렇게 말하면 조금 부족하고 무서워하기는커녕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본 데서 시작됐다. 내가 좋아하고 사람이 사랑하는 동물이니까 적어도 거부감을 드러내지는 않기 위해서 노력하다 보니, 처음에는 거짓 반가움이었던 것이(말로는 "아 귀엽다"라고 하지만 가까이 가거나 만지지는 않았던) 진짜 반가움이 되고 두려움은 애정으로 변해갔다.


   어느 순간 내가 했던 "무서워"라는 말을, 내가 들었던 "무서워"라는 말로 치환할 수 있게 됐다. 중학교 1학년 때, 먼저 수업이 끝난 친구네 반 앞에서 종례가 끝나길 기다리며 워크맨으로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때 지나가던 한 친구가 "무슨 음악 들어?" 하고 물으며 이어폰 한쪽을 자기 귀에 꽂더니 금세 인상을 찌푸렸다. "무서워, 왜 이런 걸 들어." 하는 것이 이유였다. 그때 내가 듣고 있던 음악은 '들국화'의 <제발>이었다. 정말 좋아하는 노래였는데 친구가 무섭다고 해서 우선 당황스러웠다. 이 노래가 무서운가?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고, 다른 사람이 좋아하며 듣고 있는 음악에 대해 너무 쉽게 무섭다고 말하는 친구에게 조금 서운한 마음이 두 번째로 들었다.


   이후로도 비슷한 경험은 섭섭지 않게 했다. 좋아해서 집에 걸어놓은 그림을 무섭다고 하는 친구는 지금도 있다. 지금은, 내가 무서움보다는 공감, 위로, 침잠 같은 다른 여러 감정을 느끼는 어떤 시각적, 청각적 작품을 보고 다른 사람은 두려움이나 공포, 나아가 의아함 같은 걸 느낄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고 만다. 하나의 작품을 보고 모든 사람이 똑같은 감정을 느끼는 게 오히려 더 무서운 일일 수도 있으니까.

 



   며칠 전에는 동네에 있는 책방 낫저스트북스에 가서 오히려 두 마리의 강아지에게 사랑을 듬뿍 받고 왔다. 한 마리는 책방 사장님이 키우시는 순돌이고, 한 마리는 (사장님이 순돌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랬던 것처럼) 유기견이었는데 임보 하면서 입양해 갈 좋은 분을 기다리고 있는 마요.


스트라이프 듀오 :  (좌)마요, (우)순돌이


   책방 생활 일 년이 넘은 데다, 더욱 에너지 넘치는 마요에게 책방 영업을 넘겨준 듯한 순돌이는 책방 바나 소파에 앉아 있으면 허벅지 위에 올라앉아 잠도 자고 사색에도 잠겨서 "무릎 강아지"라는 별명을 얻었다. 주말에 글을 좀 쓰려고 책방에 갔다가 순돌이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잘 안 써지던) 글은 못 쓰고 마침 가까이 있었던 책 한 권을 골라 읽었는데, 그게 또 너무너무 재밌어서 이것도 다 순돌이 덕분이구나 했다(뭘 해도 좋은 순돌이).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책방 문을 열거나 산책 중에 길에서 마주치면 너무너무너무너무 반가워해줘서 내가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반가운 존재였나 싶을 정도로 애정을 준 게 순돌이었는데, 그 역할은 이제 마요가 한다.


손을 베고 잠든 순돌이. Enter to Sleep.


   마요는 사장님이 연말에 강원도로 휴가를 떠났다가 만난 인연으로 좋은 분을 만날 때까지 돌보고 있는 강아지로,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책방에 들어가면 말 그대로 두 손 들고 버선발로 맞아준다. 지난 주말 책방에 갔을 때는 한 손님이 떠난 후 문가에 두 손 짚고 서서 하염없이 바라보는 모습도 봤다. 옆에서 놀아달라고 보채지만 책을 읽는다던가 글을 쓰는 일에 집중하고 있으면 또 그대로 내버려 둘 줄 아는, 배려심 넘치는 애굣덩어리다.


애굣덩어리, 마요


   이 글을 쓰는데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건, 지금 비가 오는 가운데 와인을 마시고 있기 때문이겠지. 마요가 좋은 분을 만나서 애교 많이 부리고 사랑 많이 받았으면 좋겠는데 어느 날 책방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벌써 서운한 기분이 든다.


   무서운 건, 그러니까 그들이 아니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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