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뢰한과 크림슨피크

2015년 마지막 영화와 2016년 첫 영화

by Mihyang Eun

2015년에 마지막으로 본 영화는 오승욱 감독의 <무뢰한>이고, 2016년에 처음으로 본 영화는 길예르모 델 토로의 <크림슨피크>다.


특별히 마지막 영화, 첫 영화라는 의미를 두고 고른 건 아니고 보고 보니 그렇게 된 거지만 왠지 두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나면 정리도 되고 시작도 될 것 같아서 괜히 한 번 두 영화를 나란히 놓아봤다.


내가 이 두 영화에 대해서 쓸 이야기는 전적으로 '나는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걸 싫어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탐구다.


이성복 선생님에게 시 수업을 듣던 시절, 선생님은 그 시가 좋은지 싫은지, 좋다면 왜 좋고 싫다면 왜 싫은지, 좋았다면 어떤 부분이 좋았고 그 부분이 왜 좋았는지를 많이 물어보셨다. 수업시간에 배우는 어떤 시들은 사실, 내가 좋아하는지 좋아하지 않는지조차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싫은 거지, 좋은지 싫은지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실은, 많은 경우 그 시들에서 어떤 감동이나 특별함을 느끼지 못했지만 수업 교재로 선택된 시들이므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좋은 시인 혹은 좋은 시라고 인정받은 고전들이므로, 좋다고 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 스스로 그 매력을 발견하지 못하면 왠지 내가 까막눈이라서, 남들 눈에는 다 보이는 좋은 점이 내 눈에만 보이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 겁이 났기 때문에 '좋아? 싫어?' '왜 좋아? 왜 싫어?'라는 너무 간단한 질문에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던 것 같다.


또 다른 이유는, 존경하는 시인을 눈 앞에 두고 그분 앞에서 내 빈약한 취향을 들키고 싶지 않았고, 가능하면 그분의 취향과 나의 취향이 같기를 갈망했기 때문이다. 보통 자신과 취향이 비슷한 사람은 싫어하기 힘드니까. 그렇게 생각해보면, 선생님의 간단한 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결국 선생님에게 사랑이 받고 싶어서였던 거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수업 시간 내내 묵비권을 행사할 수는 없었고, 우리는 조금씩 선생님에게 훈련을 받았다. 선생님은 '좋은 이유를 말할 수 없다면 그건 제대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조금씩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디가 좋고 어디가 싫은지를 파악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좋다 싫다 결정하기 애매하고, 왜 좋고 왜 싫은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하지만, 가능하면 생각해보려고 한다. 나는 영화평론가나 전문서평가는 아니므로, 영화나 책을 보고 나서 쓰는 것들은 결국 나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어떤 걸 좋아하는 사람이고, 또 어떤 걸 싫어하는 사람인지.





2015년에 마지막으로 본 영화 <무뢰한>은 아주 진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다. 한 형사가 자신이 추적하는 살인 용의자를 잡기 위해 그의 내연녀 주변을 맴돌고, 둘 사이가 가까워지고, 그래서 그 잠복은 더 이상 순수한 잠복이 아니게 되는 그런.


<무뢰한>의 매력은, 진부한 이야기를 갖고 새로운 이야기인 양 포장하지 않고 인물과 그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에 집중한다는 데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영화들에서 반복한 이야기지만, 그래서 새로울 것 하나 없지만, 그 진부한 이야기의 한가운데 있는 재곤과 혜경이라는 인물은 살아 있다. 실화도 영화 속으로 들어가면 극의 재미와 쉬운 감동을 위해 과장되고 전형화되기 마련인데, 재곤과 혜경은 지금까지 많이 본 캐릭터임에도 비슷한 이야기들의 반복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 영화를 이야기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도연의 연기를 칭찬하는데, 혜경을 연기한 전도연의 얼굴과 몸은 정말 혜경 그 자체라고 할 만하다. 텐프로로 시작해서 이제는 살인 용의자의 내연녀이자 화류업계의 퇴물이 돼버린 혜경이라는 여자가 보톡스를 맞고 빵빵한 얼굴, 탱탱한 피부로 화면에 등장했다면 일단 거기서부터 관객이 혜경에 몰입하기 어려웠을 텐데 전도연은, 실제로 혜경이라는 여자가 있다면 그런 얼굴, 그런 표정이었을 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혜경이 살고 있는 낡은 아파트나 오래된 주점의 모습 역시 영화에 현실감과 분위기를 더하고, 뿐만 아니라 그 공간에 있는 사람들을 그대로 반영하고 대변해준다. 가뜩이나 긴 하루를 보내고 지친 혜경은 집으로 돌아갈 때조차 오르막길을 힘겹게 올라야 하고, 집에서 나오면 여지 없이 하이힐을 신고 다시 내리막길을 걸어내려와야 한다.



찝찝한 결말도 좋았다. 형사는 살인범을 잡고, 처음에는 살인범을 잡기 위한 미끼였던 내연녀와 사랑에 빠져 행복하게 잘 살면 좋겠지만, 인생이 언제 그렇게 호락호락한 적이 있었나. 보통의 여자라면, 믿었던 남자가 사실은 자신을 이용한 거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 배신감을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보통의 여자라면, 그렇게 쉽게 손에 칼을 쥐기도 어렵다. 그런데 혜경은 손에 칼을 쥐고 그 남자를 안으며 배에 칼을 찔러 넣는다. 그리고 운다. 그럴 법하면서도, 또 이런 유의 영화에 걸맞은 결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좋았다.





2016년에 처음으로 본 영화 <크림슨피크>는 내가 좋아하는 유의 영화는 아니다. 유령이 등장하는 고딕 스타일의 러브 스토리라니. 유령도 비현실, 고딕도 비현실, 나는 비현실과 비현실의 조합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길예르모 델 토로의 <판의 미로 : 오필리아의 열쇠>는 굉장히 좋았다. 지금 쓰며 생각해보니 판의 미로 역시 판타지 영화지만, 스페인 내전이라는 현실적인 이야기에 녹아 있기 때문에 내가 그 영화에 더 매료됐던 것 같다.


<크림슨피크>도 <무뢰한>처럼 서사 구조 자체는 하나도 특별할 게 없었다. 하지만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만들어낸 영화 속 공간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미국 처녀 이디스는 영국 귀족('남작'도 아니고 '준 남작')과 결혼해 그가 대대로 살아온 오래된 성에서 살게 되는데, 이 공간이 곧 그들의 이야기라고 해도 될 만큼 중요한 공간이다. 그렇게 때문에 잘 만들어진 공간이 잘 만들어진 이야기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교회 지붕이 뾰족한 이유는 가능한 하늘과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의 열망을 담고 있다고 한다. 귀족들이 사는 성은 건물의 화려함, 크기, 높이가 곧 그들의 지위와 권위를 상징한다. 하지만 이디스가 살게 된 이 오래된 성은 크고 높고 그보다 더 높은 지붕을 갖고 있지만, 그 지붕은 이미 낡아서 지붕의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다. 그래서 지붕을 통해 보호받고, 바깥과 분리되어 있어야 할 지붕의 아래쪽, 저택의 내부에는 늘 계절이 쌓인다.


낙엽 지는 계절에는 나뭇잎들이 쌓이고, 비가 오면 젖고, 겨울이 되면 눈이 쌓이고.


처음에 스산하게 느꼈던 이 '쌓이는 공간'은 영화에서 계속해서 중요하게 쓰이는데, 이디스가 이 위로 피를 흘리면서 떨어지는 장면을 위해 감독은 이런 공간을 만든 게 아닌가 싶고, 나는 길예르모 델 토로의 그런 점이 좋다.


새하얀 눈밭과 그 위에 흩뿌려지는 새빨간 피의 대조 역시 이 영화의 미적인 하이라이트를 장식한다. 흰 눈 위의 붉은 피 역시 코엔 형제의 <파고>를 비롯해 많은 영화들이 사용해온 미장센이긴 하지만, 이 영화에서도 여전히 매력적으로 쓰였다. 영국 귀족 토마스는 자신의 저택 아래의 붉은 흙들을 캐내서 그것으로 쇠퇴해버린 가문을 일으키고자 하는데, 겨울이면 눈으로 뒤덮인 땅에서 솟아나오는 진홍색 흙들이 그곳을 새빨갛게 물들이기 때문에 저택의 별명이 '크림슨피크'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영화의 후반부로 가면, 그 땅위에서 사람이 흘리는 피와 땅이 내보내는 붉은 흙이 서로 구별할 수 없게 뒤섞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흰색과 붉은색이 서로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나는 왜 이런 색감을 볼 때마다 감흥을 느끼는 것일까.


흰 색은 빛의 조합이고, 검은색은 색의 조합이라고 미술시간에 배웠다. 빛이 있으면 선명히 볼 수 있고, 색이 짙어지면 점점 더 본래의 색을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희고 밝은 것을 선하고 좋은 것으로 느끼게 된다. 그러니까 흰 눈은, 색으로 표현할 수 있는 순수함의 극한이기 때문에, 그 위에 인간의 끓는 피가 떨어지는 모습은 우리에게 가장 선명한 공포를 전달한다. 이왕 살기와 공포를 보여줄 것이라면, 그 매체가 다름 아닌 눈으로 보는 영화라면, 장면으로 그것을 최대한 생생하고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미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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