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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zarirang Aug 02. 2021

그때의 회상

기억을 소환하며...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린 시절이었다.

막둥이들이 벌써 나의 그 시절을 지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내 눈에는 아직도 아가스럽기만 한 내 딸들의 나이에 나는 첫 딸을 낳았다.

그 시절에도 좀 이른 결혼이기는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학원 강사로 일을 하다가 결혼을 했고 띠동갑의 큰딸을 낳았으니까....

멋모르던 시절의 아득한 이야기지만 요즘은 뜬금없이 간혹 그 시절이 떠오르곤 한다.

어떤 장면은 지워버렸으면 싶기도 하고, 어떤 장면은 소중하기도 하며, 어떤 장면은 내 가슴을 여전히 아리게 만든다.

첫딸은...

허니문 베이비처럼 내게 온 첫딸은 내가 결혼하고 그다음 해에 내 품에 안겼다.

하필이면 중복이었던 그 더운 한여름 밤에...

제법 큰... 지금도 이름을 대면 알만한 큰 산부인과 병원이었는데도 달랑 나와 어떤 산모 둘이서 산통을 겪고 있었다.

그나마 나처럼 철없이? 중복날에 애를 낳는 벗이 그래도 한 명은 있었던 셈이다.

첫아이여서 그랬을까?

아침 일찍 입원을 했음에도 뉘엿뉘엿 해가 지고 별이 총총하게 뜰 즈음까지도 나는 여전히 산통을 겪어야만 했다.

어찌나 졸리던지... 그냥 아픔도 잊고 한숨 실컷 자고 일어났으면 소원이 없겠다 싶었다.

산통이 조금 수그러들면 깜빡 꿈까지 꾸고 잠이 들다가 다시 송곳으로 찌르는듯한 산통에 나 죽겠노라 난리부르스를 추었다.

어찌어찌 자연분만으로 아이를 낳았다.

그때 의사의 한마디는 평생 잊지 못한다.

지금도 그 남자 의사의 얼굴을 몽타주로 그리라면 그릴 수 있을 정도다.

"좌우간.... 딸 낳는 여자들이 더 요란하다니까..."

이 한마디를 던지고 아이를 낳은 뒤처리를 하고는... "이쁘게 됐어요~~~"하곤 나가버렸다.

순간.... 산통이 다 한 후에 밀려오는 무안함과 첨 보는 사람들 앞에서 나의 치부를 다 드러냈다는 부끄러움이 몰려왔고 그날의 일은 두고두고 마음에 상처가 됐다.

그럼에도 그날 남편한테 입도 뻥끗 못한 것이 지금까지도 억울하다.

딱 부러지는 남편 성격에 성적 수치심까지 느낀 마지막 한마디는 충분히 그 의사에게 아니 병원 측에 항의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랬다면... 나의 상처에 반창고라도 붙여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그때 너무 어렸고.... 그냥 나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고.... 첫 딸을 낳았다는 기쁨에 그 일은 그냥 묻어두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첫딸을 낳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딸 하나만을 소중히 키웠다.

그 시절에 영어유치원까지 보낼 정도로...

옷도 매일 공주처럼 입혀서 혹여 유치원 버스 운전하시는 분이라도 바뀌면 바로 전화를 걸어 확인을 하는 유별까지 떨면서 그렇게 딸을 키웠다.

참 소중했고 세상이 모두 그 작은 딸아이를 위주로 돌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산 시절이었다.

한국에서의 삶은 더 이상의 가족을 만들 수 없을 만큼 바쁘고 바쁘게 돌아갔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양가 부모님들이 하나만 낳아 키우는 건 너무 외롭지 않냐고 성화를 부리셨고...

터울이 더 나기 전에 아이들 갖자고 했지만...

모든 게 뜻대로는 되지 않았다.

그렇게 또 세월이 흘렀다.

아이를 안 갖는 것과 못 갖는 것은 참 큰 차이가 있었고 그런 와중에 여차 저차 하여 태평양을 건너 지금 살고 있는 이곳으로 이민까지 오게 되었다.

또 다른 추억....

지금도 함께 사는 시어머니는 "저것들 안 낳았으면 어쩔 뻔했니???" 하신다.

저것들.... 이란 의미에 문자적인 것으로 따지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할머니의 애정이 더 듬뿍 담긴 팔순을 훌쩍 넘긴 그 시절 분들의 애칭? 쯤으로 이해를 하면 될듯싶다.

시어머니의 표현 데로 울 막둥이들을 안 낳았으면 어땠을지 상상이 안 간다.

큰딸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뭐 그런 뜻은 아니다.

하나면 하나 데로 외로우면 외로운 데로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일 테니까...

그럼에도 나는 두 딸이 있어 행복하다...

두 딸.... 둘째와 셋째는 쌍둥이로 내게 왔다.

한국을 떠난 지 정확하게 1년이 되던 그날에....

영어가 서툴고 문화가 다른 이곳에서 나는 아이를 낳았다. 그것도 쌍둥이를...

그 과정을 글로 적자면... 아마도 2~3편으로 나누어야 할 듯싶다.

셋째가 거꾸로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선 당연히 재왕절개였을텐데... 나는 자연 유도분만으로 낳았다.

이 말인즉.... 스토리가 길고 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와 같은 케이스가 흔하지 않기에 담당의사가 조용히 그리고 아주 공손히 와서 나와 남편에게 부탁을 했다.

의대생들에게 참관 수업을 하면 안 되겠냐고...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남편은 내게 교육적인 측면에서 좋게 생각해서 그렇게 하자고 했다.

나는 너무 아팠고.... 이 나라는 이런 건가 싶었고.... 어쨌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나오려는 순간에... 아니 의사들에 의해 꺼내지는 그 순간에 학생들이 숨을 죽이고 이 열 종대로 들어와 나란히 서서 조용히 그 순간을 지켜보며 나지막하게 그 과정을 설명하는 교수의 강의를 열심히 듣고 공책에 무언가를 끄쩍끄쩍 적곤 했는데 그 모습이 경건하기까지 했다.

아이가 나오는 그 와중에... 나의 눈에 그 모든 장면이 선명이 들어왔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그럼에도 첫 딸을 낳았을 때의 수치심은 들지 않았다.

분명 나의 모든 치부가 드러났고 수십 개의 눈동자들이 나를 지켜봄에도 웬일인지 마치 내가 강의를 하고 있는 그런 느낌까지 들었다.

두 딸은 여차 저차 하여 2.8kg, 2.3kg라는 쌍둥이라곤 믿기지 않게 건강하게 태어났고 학생들은 모두 내게 감사와 축하의 제스처를 하며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

첫딸을 낳았을 때완 다르게 똑같이 난리부르스를 췄는데도...

옆에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힘들어하며 내 손을 놓지 않았던 남편이 있어서였는지....

내가 아이를 낳는 동안 들락거렸던 모든 분들의 친절과 격려 때문이었는지...

나는 그날 아이들을 무사히 낳았다는 뿌듯함과 감사함만이 따뜻하게 내 마음에 남아있다.

그렇게 나는 세 딸을 두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이제 막둥이 두 딸까지도 나의 그 시절, 그 나이를 지나고 있다.

참 세월이라는 게 유수와 같다더니... 나이를 먹어서야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되니 나도 참 우습다.

그리고...

세월이 또 그렇게 흘러...

나는 시어머니의 그 모습이 될 테고...

내 딸들은 나의 모습이 되어 그때를 회상하겠지....

그 순간이 되면...

내 딸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일까?

가끔 나를 힘들게 하는 시어머니의 모습을 모며....

나는 저렇게 하지 말아야겠다 싶지만....

그 나이가 되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나는....

내 딸들에게 좀 괜찮은 엄마이고 싶다.

그 시절이 오면...

나는 내 딸들과 그저 친구처럼 연인처럼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사랑을 느끼는 그런 관계이고 싶다. 

그런 욕심을 부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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