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장면은 지워버렸으면 싶기도 하고, 어떤 장면은 소중하기도 하며, 어떤 장면은 내 가슴을 여전히 아리게 만든다.
첫딸은...
허니문 베이비처럼 내게 온 첫딸은 내가 결혼하고 그다음 해에 내 품에 안겼다.
하필이면 중복이었던 그 더운 한여름 밤에...
제법 큰... 지금도 이름을 대면 알만한 큰 산부인과 병원이었는데도 달랑 나와 어떤 산모 둘이서 산통을 겪고 있었다.
그나마 나처럼 철없이? 중복날에 애를 낳는 벗이 그래도 한 명은 있었던 셈이다.
첫아이여서 그랬을까?
아침 일찍 입원을 했음에도 뉘엿뉘엿 해가 지고 별이 총총하게 뜰 즈음까지도 나는 여전히 산통을 겪어야만 했다.
어찌나 졸리던지... 그냥 아픔도 잊고 한숨 실컷 자고 일어났으면 소원이 없겠다 싶었다.
산통이 조금 수그러들면 깜빡 꿈까지 꾸고 잠이 들다가 다시 송곳으로 찌르는듯한 산통에 나 죽겠노라 난리부르스를 추었다.
어찌어찌 자연분만으로 아이를 낳았다.
그때 의사의 한마디는 평생 잊지 못한다.
지금도 그 남자 의사의 얼굴을 몽타주로 그리라면 그릴 수 있을 정도다.
"좌우간.... 딸 낳는 여자들이 더 요란하다니까..."
이 한마디를 던지고 아이를 낳은 뒤처리를 하고는... "이쁘게 됐어요~~~"하곤 나가버렸다.
순간.... 산통이 다 한 후에 밀려오는 무안함과 첨 보는 사람들 앞에서 나의 치부를 다 드러냈다는 부끄러움이 몰려왔고 그날의 일은 두고두고 마음에 상처가 됐다.
그럼에도 그날 남편한테 입도 뻥끗 못한 것이 지금까지도 억울하다.
딱 부러지는 남편 성격에 성적 수치심까지 느낀 마지막 한마디는 충분히 그 의사에게 아니 병원 측에 항의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랬다면... 나의 상처에 반창고라도 붙여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그때 너무 어렸고.... 그냥 나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했고.... 첫 딸을 낳았다는 기쁨에 그 일은 그냥 묻어두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첫딸을 낳았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딸 하나만을 소중히 키웠다.
그 시절에 영어유치원까지 보낼 정도로...
옷도 매일 공주처럼 입혀서 혹여 유치원 버스 운전하시는 분이라도 바뀌면 바로 전화를 걸어 확인을 하는 유별까지 떨면서 그렇게 딸을 키웠다.
참 소중했고 세상이 모두 그 작은 딸아이를 위주로 돌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산 시절이었다.
한국에서의 삶은 더 이상의 가족을 만들 수 없을 만큼 바쁘고 바쁘게 돌아갔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양가 부모님들이 하나만 낳아 키우는 건 너무 외롭지 않냐고 성화를 부리셨고...
터울이 더 나기 전에 아이들 갖자고 했지만...
모든 게 뜻대로는 되지 않았다.
그렇게 또 세월이 흘렀다.
아이를 안 갖는 것과 못 갖는 것은 참 큰 차이가 있었고 그런 와중에 여차 저차 하여 태평양을 건너 지금 살고 있는 이곳으로 이민까지 오게 되었다.
또 다른 추억....
지금도 함께 사는 시어머니는 "저것들 안 낳았으면 어쩔 뻔했니???" 하신다.
저것들.... 이란 의미에 문자적인 것으로 따지면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할머니의 애정이 더 듬뿍 담긴 팔순을 훌쩍 넘긴 그 시절 분들의 애칭? 쯤으로 이해를 하면 될듯싶다.
시어머니의 표현 데로 울 막둥이들을 안 낳았으면 어땠을지 상상이 안 간다.
큰딸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뭐 그런 뜻은 아니다.
하나면 하나 데로 외로우면 외로운 데로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일 테니까...
그럼에도 나는 두 딸이 있어 행복하다...
두 딸.... 둘째와 셋째는 쌍둥이로 내게 왔다.
한국을 떠난 지 정확하게 1년이 되던 그날에....
영어가 서툴고 문화가 다른 이곳에서 나는 아이를 낳았다. 그것도 쌍둥이를...
그 과정을 글로 적자면... 아마도 2~3편으로 나누어야 할 듯싶다.
셋째가 거꾸로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선 당연히 재왕절개였을텐데... 나는 자연 유도분만으로 낳았다.
이 말인즉.... 스토리가 길고 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와 같은 케이스가 흔하지 않기에 담당의사가 조용히 그리고 아주 공손히 와서 나와 남편에게 부탁을 했다.
의대생들에게 참관 수업을 하면 안 되겠냐고...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남편은 내게 교육적인 측면에서 좋게 생각해서 그렇게 하자고 했다.
나는 너무 아팠고.... 이 나라는 이런 건가 싶었고.... 어쨌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나오려는 순간에... 아니 의사들에 의해 꺼내지는 그 순간에 학생들이 숨을 죽이고 이 열 종대로 들어와 나란히 서서 조용히 그 순간을 지켜보며 나지막하게 그 과정을 설명하는 교수의 강의를 열심히 듣고 공책에 무언가를 끄쩍끄쩍 적곤 했는데 그 모습이 경건하기까지 했다.
아이가 나오는 그 와중에... 나의 눈에 그 모든 장면이 선명이 들어왔다는 것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그럼에도 첫 딸을 낳았을 때의 수치심은 들지 않았다.
분명 나의 모든 치부가 드러났고 수십 개의 눈동자들이 나를 지켜봄에도 웬일인지 마치 내가 강의를 하고 있는 그런 느낌까지 들었다.
두 딸은 여차 저차 하여 2.8kg, 2.3kg라는 쌍둥이라곤 믿기지 않게 건강하게 태어났고 학생들은 모두 내게 감사와 축하의 제스처를 하며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
첫딸을 낳았을 때완 다르게 똑같이 난리부르스를 췄는데도...
옆에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힘들어하며 내 손을 놓지 않았던 남편이 있어서였는지....
내가 아이를 낳는 동안 들락거렸던 모든 분들의 친절과 격려 때문이었는지...
나는 그날 아이들을 무사히 낳았다는 뿌듯함과 감사함만이 따뜻하게 내 마음에 남아있다.
그렇게 나는 세 딸을 두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이제 막둥이 두 딸까지도 나의 그 시절, 그 나이를 지나고 있다.
참 세월이라는 게 유수와 같다더니... 나이를 먹어서야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게 되니 나도 참 우습다.
그리고...
세월이 또 그렇게 흘러...
나는 시어머니의 그 모습이 될 테고...
내 딸들은 나의 모습이 되어 그때를 회상하겠지....
그 순간이 되면...
내 딸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일까?
가끔 나를 힘들게 하는 시어머니의 모습을 모며....
나는 저렇게 하지 말아야겠다 싶지만....
그 나이가 되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나는....
내 딸들에게 좀 괜찮은 엄마이고 싶다.
그 시절이 오면...
나는 내 딸들과 그저 친구처럼 연인처럼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사랑을 느끼는 그런 관계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