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면 문을 닫는 카페여서 인심 좋은 지인이 어머니 가져다 드리라고 하며 남은 샌드위치와 몇 가지 카페 메뉴를 싸 주셨다.
저녁이 해결된 나는 감사하다고 하며 울 어머님이 카페 음식도 좋아하셔서 저녁에 먹어야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 연세에 이런 종류의 음식을 좋아하시기 힘든데 정말 다행이라고 하면서....
그분이..."그러게 말이야~ 자기는 복도 많아... 우리 시어머니 같았으면... 아마 상이 뒤집어졌을 거야...."
딱 요기까지 했는데... 옆에 있던 딸이..."엄마~~ 이제 그만 하세요..." 한다.
"으그... 그래도 지들 할머니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면 싫어한다니까..." 하며 멋쩍게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딸들~~ 니들이 알아?
"애구~ 그 시절에 다 그랬지요~" 하며 육십이 넘은 지인분의 푸념에 한마디 거들고는 뒤돌아 나왔다.
집에 오면서 생각이 많아졌다.
한국에 살면서 겪은 그 젊은 시절의 시집살이가... 태평양을 건너와서까지 한으로 남아 있구나 싶었다.
그 한을 누가 알아줄까?
만약 딸이 옆에서 "그니까... 울 엄마 힘들게 사셨어~`"라고 했다면 좀 나아질까?
하지만 딸의 입장에선 어릴 적 한없이 잘해주셨던 할머니에 대한 추억 때문에 엄마를 힘들게 했다고 하는 그 한에 대한 넋두리조차 듣고 싶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딸 입장에선 그게 언제 적 일이던가?
몇십 년 전 일을 그것도 이제 고인이 된 할머니인데 아직까지 기회만 되면 다시 이야기를 꺼내는 육십 넘은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랬으니까...
엄마의 마음은...
울 엄마~~ 나의 친정엄마의 스토리는 쓰자면 장편소설이다.
내가 결혼할 즈음에도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3대가 한집에 살았다. 엄마가 시집와서부터 쭈욱~~~
아빠와 띠동갑이었던 할머니는 조금씩 눈에 문제가 생겨서 육십이 넘으면서는 거의 실명을 하신 상태였다.
아빠가 8살이었던가... 혼자된 할아버지에게 할머니는 처녀로 시집을 오셔서 자기 자식도 못 낳고 아빠를 포함한 삼 형제를 자기 자식으로 키우셨다. 할아버지 입장에선 두 번째 부인인 샘이지만 할머니 입장에선 초혼이 샘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아빠 입장에선 그냥 엄마였고 우리에게는 돌아가신 할머니는 이야기로만 들었을 뿐이니 우리를 애지중지 키워주신 할머니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우리의 할머니셨다.
그러나... 엄마에겐 정말 젊디 젊은 시어머니셨고... 아이를 낳아보지 않았으니 임신의 힘듬을 알리 만무한 일이고 산고는 그야말로 눈으로 본 것이 다였던 시어머니셨다.
그러니... 그동안 겪은 그 시집살이가 얼마였겠는가?
그럼에도... 내가 결혼하기 전에 엄마가 할머니 몰래 우리에게 쏟아내는 한 맺힌 소리들은 정말 그냥 소리였다.
넋두리... 로만 여겨졌기에... 한 번도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지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는 바쁘다는 이유로 명절이나 생신 때만 갔으니 더 이상 엄마의 넋두리를 들을 기회가 없었고...
할아버지는 내가 결혼을 하고 몇 해만에... 그리고 할머니는 내가 이민을 오고 한참 후에 모두 돌아가셨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엄마의 넋두리...
다행히도 코로나가 있기 전인 2017년과 2019년, 연거푸 두 번 한국을 방문했었다.
갈 때마다 한 달 정도 친정에서 머물렀다.
2017년에는 너무 오랜만에 한국을 갔었기 때문에 다른 여행이나 만남은 뒤로하고 친정부모님과의 시간을 갖기로 했다.
처음에... 나는 엄마가 치매일까? 싶었다.
매일 거의 비슷한 이야기를 아침저녁으로 했다.
엄마가 결혼을 해서부터..... 나와 동생들을 낳으면서 겪은 한 맺힌 시집살이.... 그리고 할머니가 실명을 하면서 겪은 어려움.... 하나뿐이 시동생인 작은 아빠네에게 받은 섭섭함... 할머니 친정식구들에게 받은 어이없는 설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칠십이 한참 넘어서야 아빠는 그때서야 '내 엄마가 새엄마였구나~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을 하셨다고 무심히 툭 한마디를 던지셨다.
아마도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그쪽 집안에서 우리 집과의 왕래를 끊은 모양이었다.
처음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혹시 엄마 아빠가 할머니를 모시지 않겠다고 할까 봐 노심초사하더니... 돌아가시기 전까지 모신 것에 대해 고맙게는 생각하더라고... 그러나 시간이 좀 지나니까 대소사에 우리 부모님을 초대하지 않더라란다. 참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일이라서 요 대목에선 내가 할 수 있는 욕이란 욕은 다해봤다.
어쨌든 한마디 뚝 던진 아빠에 비해 엄마에겐 그것 조차 엄마의 넋두리에는 한으로, 분으로 표출이 되었다.
처음에는 나도 함께 화도 내고 고개도 떨어질 정도로 끄덕였는데...
첫날 이후로 매일 같이 비슷한 이야기를 쏟아내니... 더 이상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듣고 있다가 여동생에게 문자를 보냈다.
"엄마가... 혹시 치매일까?"
동생은 웃음 표시를 보내면서..."^^ 노노~~" 했다.
엄마의 도도리 표!
2019년 두 딸들과 함께 갔을 때도 한국 정서를 잘 모르는 두 딸들에게도 엄마의 도도리 표는 계속되어 두 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딸들이 먼저 뉴질랜드로 돌아가고 친정에 남은 우리 부부에게 쉴 새 없이 엄마의 도도리 표는 계속되었다.
그렇게 엄마의 도도리 표를 들으면서...
어느순간 마음이 뭉클하며 가슴이 시려 왔다.
엄만... 그렇게 지나온 세월 속에 갇혀있었던 거였다.
그 누구도 엄마의 한을 풀어주지 못한 것이었다.
남편은 조용히 듣다가 "장모님~ 참 힘드셨겠어요!"
그 한마디에 엄마의 눈시울이 붉어졌고... 옆에 있던 아빠가 "그럼... 그 세월을 누가 알겠나!! 내 동생조차 몰라주더군..." 하며 엄마 편이 되어주자 굵은 눈물방울이 엄마의 두 볼에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랬구나~ 그냥 들어주고 공감해 달라는 거였구나~'
돌아오는 그날까지 듬성듬성 이었지만 엄마의 한풀이는 계속되었고 나는 격하게 공감하며 함께 울분을 토해냈다.
엄마를 이해하고 나니 들을 때마다 엄마의 그 한 맺힌 한마디 한마디가 그냥 나에게 와서 아프게 박혀버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