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호주 출신 방송인 샘 해밍턴이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서 하는 말을 듣고 박장대소한 적이 있다.
너무 공감이 되었기에...
토끼와 거북이
이곳에서 살다 보면...
속이 터져 버릴 것 같을 때가 있다.
처음에는 정말 이해가 되질 않았고 이렇게 살면서도 먹고 산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뉴질랜드에 와서 처음으로 우체국에 집세를 내러 갔다.
줄은 문밖까지 늘어서서 자동문이 작동이 안 될 정도였다.
그럼에도 줄은 줄어들지를 않았고... 임신 초기였던 나는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남편의 몸에 의지해서 차례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성질 급한 남편은 덩치 큰 사람들 너머로 도대체 무슨 일인지 발꿈치까지 세우고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좀 시간이 지나서 알았다.
그렇게 긴 줄을 만들며 서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평온 모습으로 자기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만... 발을 동동거리며 온몸을 좌우로 흔들며 오두방정을 떨고 있었다.
창구 앞에 서서 일을 처리하고 있는 직원과 손님의 대화가 들릴 정도로 우리가 앞으로 전진을 했을 즈음에서 야 왜 이렇게 줄이 안 줄어드는지 이유를 알게 되었고 나는 그만 어이없는 실소를 터트렸다.
눈앞의 관경은...
말 그대로 '슬로비디오'였다.
창구 앞에 와서야 오지랖 넓게 서로 인사까지 나누면서 서서히 가방을 열고 내야 할 서류를 꺼내고 다시 지갑을 꺼내서 카드를 꺼내고 결제를 하다 말고 다시 직원의 옷차림과 액세서리 이쁘다고 칭찬을 하고... 직원은 하던 손을 멈추고 장단을 맞추고... 영수증을 받아 들고도 자리를 뜰 줄 모르고 다시 수다를 잠시 떨다가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뜨는 것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터득한 습관대로 창구가 가까워 오면 내 앞에 한두 사람이 더 있음에도, 벌써 처리할 서류를 꺼내고 현금이든 카드든 꺼내서 손에 쥐고 내 차례가 오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착' 내밀면 직원은 일사천리로 도장 '꽝'~ 영수증 '착'~ 서로 눈인사할 틈도 없이 '숑'~
이렇게 살아온 나는 눈앞의 관경이 생경할 수밖에 없었다.
토끼와 거북이는 공존할 수 있을까?
토끼 나라에서 종종거리며 살던 나는 그렇게 거북이 나라로 와서 둥지를 틀었다.
비단 우체국에서 뿐이랴~
마트에서도... 은행에서도... 사람도 몇 안 사는 이곳에서 줄은 늘 길었고 잘 줄어들지도 않았다.
수도꼭지에서 물만 똑똑 떨어져도...
전화로 예약을 해야 했고 그러면 빨라야 두 주, 늦으면 한 달도 넘는 날짜로 약속을 잡는다.
와서 고치는 시간은 불과 십여분인데도 말이다.
편한 점도 있다.
머리를 자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고 하다못해 안경점에 가서 시력을 재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니... 불편한 듯하지만 예약한 그 시간은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이니 기다리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돼서 좋다.
은행도 직원과 만나는 시간을 정하고 가면 바로바로 일을 볼 수 있어서 좋고...
세월이 흘렀다.
토끼인 나는 거북이 나라에서 잘 살고 있을까?
요즘도 나는 가끔 속이 터진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거북이 나라에서 살고 있으니... 그 법에 따를 수밖에~
거북이가 본 토끼의 세상~
셈 해밍턴이 자기의 고향 호주를 갔단다...
사회자가 호주가 참 좋지요?라고 물었더니...
"답답해서 못살아요~ 인터넷도 늘이고... 고장 나서 고치려고 하면 몇 주가 걸리고..."
호주에 살던 거북이가 토끼의 나라 한국에 와서 토끼로 변해버렸구나 싶었다.
빠르다는 것은 곧바로 편한 것이 되기도 하니까..
어쩌면 거북이 세상보다는 토끼의 세상이 활기차고 사람 사는 세상 같을 수도 있겠다 싶다.
토끼가 거북이의 세상에서 사는 법
사실 내가 사는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는 한적하고 조용한 도시다.
급한 것도 없고 급할 것도 없는 그런 도시...
아주 사소해서 이것도 뉴스야 하는 것이 이슈가 되기도 하는 그런 도시...
여기서 살다가 북섬의 오클랜드나 수도인 웰링턴으로 이주를 한 교민들이 한결같이 "이곳은 정말 한국처럼 빨라요~ 일이 일사천리로 된다니까... 크라이스트처치하곤 아주 딴판 예요~"라고 한다.
오클랜드나 웰링턴에 살다가 호주로 이주한 교민들은 "뉴질랜드는 너무 시골이죠~ 이곳에선 일상이 얼마나 빠쁘게 돌아가는지... 한국하고 똑같아요~"라고 하고...
호주 사람 샘 헤밍턴은..."호주는... 너무 느려요~ 답답해서 못살아... "라고 하고...
토끼였던 나는 어쩌다 보니... 거북이 세상 중에서도 제일 느린 세상에 와서 살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는 법을 잊어버렸다.
아니 뛰는 법을 알고 있다고 해도 써먹지를 못하니 잊는 것이 편하다.
그럼에도...
이 도시는 오늘도 아주 잘 돌아간다.
멈춘듯하지만 쉬지 않고 가고 있는 시계처럼... 곁눈질도 하지 않고 도도하게 앞으로 조금씩 움직이며 이들만의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내가 토끼던 거북이던 그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 그 속에서 그저 나의 일을 하면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