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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zarirang Dec 07. 2019

동물 본능

기선제압을 하는 방법

지난주 목요일이었다.

매주 이날이면 나는 혼자서 손주를 데리러 데이케어(어린이집)에 간다.

올망졸망한 그 또래 아이들이 모두 누군가를 기다리며 오후 3시가 훌쩍 넘도록 놀고 있다.

19개월인 손주 세비가 데이케어 놀이터에서 놀고 있기에 "세비~"하고 부르며 두 팔을 벌렸더니 첨으로 "함미~"하고 달려와 안겼다.

이런 느낌이라니... 할미가 되어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공감할 수 없는 짜릿함이었다.

"오메~ 내 새끼...." 하며 엉덩이를 두드리고 번쩍 들어 올려 구름 위를 걷듯이 차로 가서 태우고 둘이서 훌랄라 거리며 세비네 집으로 갔다.


사람 손주 한 명과 손쥐 두 마리

세비네는 두 마리의 멍이들이 있다. 결혼 전부터 키우기 시작해서 내가 품어 키운 리카도라는 비숑 손쥐 놈과 결혼 후에 사위가 한 마리는 외롭다며 데려온 시추와 비숑이 적당하게 섞인 너텔라라는 손쥐 가시나~

(손쥐= 멍멍이 손주라는 의미)

그날은 30분 정도 일찍이었다.

리카도가 치질로 수술을 받아 하루 동안 병원에 있어야 한다고 해서 사돈총각이 혼자 있는 너텔라와 놀아주며 손주 세비네에 있었는데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야 한다고 하기에 혼자 있을 너텔라를 위해 내가 세비를 픽업해서 조금 일찍 가기로 한 것이었다.


집 앞에 도착하자 어떻게 알았는지 현관문 옆에 있는 유리창 너머로 "할미~~ 할미~"하며 짖는 소리가 온 동네에 울려 퍼졌다.

세비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우리를 반기는 너텔라의 세리머니는 혼자 보기 아까운 광경이었고...


나는 얼른 꼬질꼬질한 세비를 샤워시키고... 우리 집 텃밭에서 따온 딸기를 씻어 먹이고... 감자를 갈고 다진 고기와 새우를 넣어 만들어온 세비 저녁을 프라이팬에 동그랑땡처럼 한 숟가락씩 올리고 그 위에 살살 치즈를 뿌려 구웠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나는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서 얼른 세비 저녁을 접시에 담아 거실 탁자에 올려주고 소파에 기대어 앉아서 티브를 트는데~ 빙글빙글 집 자체가 도는 것 같아 옆으로 스르르 누웠다.


위급상황이 발생하다

세비와 너텔라는 직감적으로 아는 것 같았다.

"할미가 이상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온 집안을 휘젓고 다니던 세비는 얌전하게 내 옆에 앉아 저녁을 먹었다.

"세비 물 가져와서 마셔~"

그러자 세비는 조르르 옆에 있는 다른 거실로 가서 먹던 물통을 가지고 얼른 와서 또 내 옆에 앉았다.

그때 마침 요란한 모터 소리가 났다.

세비네 가드너가 잔디를 자르러 온 모양이었다.

옆집 차 소리만 나도 "워~~ 워워~~"하며 여우 울음소리 같이 짖던 너텔라는 탁자 밑에 웅크리고 앉아 나만 쳐다보고 있고...

세비는 얼른 먹을 것을 하나 쥐고 나에게 찰싹 붙어 앉았다.


도저히 일어나서 앉을 수도 없이 어지러워서 하는 수 없이 운동 간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고 남편은 부랴부랴 세비네로 달려왔다.

30분 남짓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세비와 너텔라는 내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마치 할미를 지켜주는 것처럼...


새로운 반전

하부지가 왔다.

일어서서 문을 열 수가 없어서 엉금엉금 기어가서 현관문을 열었다.

남편은 간혹 있는 일이었지만, 혼자 손주를 보고 있을 때 일어난 일이기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온듯했다.

그때서야... 탁자 밑에 웅크리고 누워있던 너텔라는 '하부지 환영 세리머니'가 끝나기가 무섭게 그때까지 가드닝을 하고 있던 가드너를 향해 무섭게 짖어댔다.

저녁을 혼자 다 먹고도 얌전하게 내 옆에 앉아있던 손주 세비는 첨으로 "하비~ 하비~"하고 부르며 달려가 안겨 한참을 있더니 이내 온 집안을 뛰어다니며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남편은 한숨 돌리고 나자 너텔라에게 내가 가져간 삶은 닭가슴살 간식을 주고 세비에게 "깍까~"를 주었다.


둘은 나를 지켜주려고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할미가 더 이상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있었던 것이 었을 뿐...

둘에게 나는 든든한 '백'이었던 것이었다.

할미 말고 다른 더 든든한 '백'인 하부지가 등장하자마자 나는 그 둘의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렸다.


나도 누군가의 백이었다!

그랬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나도 누군가에겐 든든한 백이었다.

처음 이곳에 와서 학교를 다녔던 큰딸에게 나는 든든한 백이었다.

물론 몇 개월이 안돼 딸에게 들통이 났지만, 처음 왔을때 친구 엄마들하고 엉터리 영어를 하는 엄마가 믿음직했을 것이다.

영어가 안 통해 하루 종일 기죽어 있다가도 교실 밖에 서 있는 나를 보면 다시 기가 살았던 딸이었으니까...


6개월짜리 리카도가 옆집 고양이를 만났을 때...

몸집을 잔뜩 부풀리고 기선을 제압하던 고양이 앞에서 뒤 걸음 질을 치던 리카도가 흘깃 뒤에 내가 서 있는 것을 보더니 쏜살같이 고양이를 향해 돌진을 했다.

이 집 저 집을 들락거리며 고양이를 쫓던 리카도를 잡느라 진땀을 뺐던 기억이 난다.

작고 겁 많은 리카도에게 나는 늙고 영악한 고양이를 쫓아갈 용기를 주었던 든든한 백이었던 거다.


나도 명품백이고 싶다!

그런데...

힘없이 옆으로 쓰러져버린 나는 더 이상 손주와 손쥐에게 백이 아니었다.

옆에서 지켜줘야 할 것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도 할미 옆이 더 안전하다고 느꼈던 것일지~ 아니면 죽어도 함께 죽읍시다!!라고 생각한 것인지~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도...

둘은 '동물적 본능'으로 내 옆을 지켰다.

아니, 지켰다기보다는 적을 향해 한걸음도 전진하지 못하고 우리끼리 뭉쳐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옆집 고양이가 털을 세워 몸을 부풀려 상대에게 기선제압을 했듯이...

셋이 뭉쳐있음으로 우리 집 가든을 점령하고 있는 가드너에게 기선제압을 하려 한 것은 아닐지....


어쨌든...

그날의 일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백'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내 새끼들의 '백'이고 싶다.

그것도 명품백...

그러려면 이놈의 '이석증'에게 내가 먼저 기선제압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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