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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zarirang Dec 12. 2019

배신자 손자를 고발합니다

너무 억울한 할미로부터

엊그제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그램에서 가짜 기자들을 고발하는 내용을 보고 나니 인터넷에 올라온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에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되었다.

내가 장난스러운 제목을 쓰고 잠깐 화장실을 간 사이에 남편은 내 제목을 보더니 나를 색안경을 끼고 본다.

"혹시??? 조회수 의식하는 거 아냐?"

요즘 부쩍 통계로 올라오는 조회수에 신경을 쓰고 있는 나에게 아주 적절한 한방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제목을 고치지 않았다.

배신자 손주를 정말로 고발할 생각이니까...


손자가 바꾼 세상


나는 딸만 셋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손자, 즉 아들이란 단어가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5살 때 아무것도 모르고 어린이용 여행 가방을 끌고 커다란 곰인형을 안고 유치원 가방을 메고 그렇게 김포공항 국제선을 탔던 큰딸이었다.

세월이 흘러, 큰딸은 이곳에서 초등학교 동창과 재회를 해서 결혼을 하고 손자 세바스찬을 낳았다.

손자가 생겼다는 것은 그동안 커다란 연못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둥둥 떠다니며 꽃을 피우는 연꽃처럼 살던 남편과 내가 언덕을 이룬 도톰한 흙 모퉁이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이민을 오기 전, 20대 신혼시절에 시어머니 친구분이 들려준 이야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미국에 살고 있는 그분의 시누네 가족은 이민을 가서 살고 있으면서도 서랍장 하나를 바꾸지 않고 못질을 해 사용하며 살았단다. 언젠가 내 조국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서였다고...

그러다가 자식들이 하나, 둘 미국에서 자리를 잡고 결혼을 하고 손자 손녀가 생기고 나서야 한국에서 가져간 오래된 가구를 하나씩 바꾸더란다. 이제는 이곳에서 싫든 좋든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고 하면서...


우리도 그랬다.

언젠가는 돌아갈 수도 있다는 전제가 우리의 삶에 늘 깔려있었다.

그래서일까 아직도 결혼할 때 혼수로 사 온 그 가구를 그대로 쓰고 있고, 한국에서 신혼 때 쓰던 대나무 흔들의자와 원목 거실 서랍장이 아직도 여기저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손자가 태어났다.

더불어 둘째와 셋째까지 이 나라에 아주 깊게 뿌리를 내려버렸다.

그 의미는 나도 이제는 이곳에서 좋든 싫든 살아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그렇다고 쓰고 있는 가구를 싹~다 버리고 살 필요는 못 느낀다.

울 딸들은 "우리 집은 가구만 바꾸어도 새집이 될걸~"하고 소심한 자기 의견을 피력하고 있지만, 굳이 쓸만한데 누가 본다고...  '앤틱'을 좋아하는 이 나라 사람들처럼 나는 말도 안 되지만 '앤틱'이라고 우기며 사용하고 있다.


할미가 된 다른 세상


띠동갑 딸이 서른이 다 돼서 아들을 낳아 할미가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젊은 할미다.

염색을 안 하면 백발이지만, 이건 순전히 유전적으로 어쩔 수 없는 억울한 일이고 아직은 5학년 중반밖에 안된 철없는 할미다.

나는 아기들이 이쁘지만, 그렇다고 다른 아기들을 엄마품에서 뺏아서 안아본 적이 한 번도 없으니 아기들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내 딸들도 이쁘기는 했지만, 그럴수록 엄하게 키우려고 했다.

'내 자식은 고슴도치도 이쁜 법!!! 나한테만 이쁜 아이로 키우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쁜 아이로 키우자!' 이것이 나의 자녀교육법이었다.

큰 딸이 임신을 했을 때부터 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이렇게 주입을 시키곤 했으니까...

"쇼핑 몰에서 음식점에서 생떼 부리고 뛰어다니고... 그런 애로 키우면 큰일야... " 등등...


그런데 손자가 태어나고 보니, 눈에 콩깍지가 씌웠는지~ 그냥 내 손자만 보였다.

음식점에서 조금 울어도 '아기들이 다~ 그렇지 뭐~' 하게 되고, 쇼핑몰에서 뛰어다녀도 '역시 아들은 좀 달라~' 이렇게 생각이 바뀌었다.

다행히 손자는 아들 치고는 그렇게 번잡하지도 않고 심하게 뛰어다니거나 땡깡을 부리진 않는다.


그럼에도 난 여전히 까칠한 할미다


큰딸은 손자가 한 살이 되자 직장으로 복귀를 했다.

손자는 데이케어(어린이집)에서 4시까지 보내고 회계사인 사위가 월요일과 화요일에 그리고 다른 날은 내가 손자를 데리러 간다.

나와 남편은 3시 반이면 데이케어에 가서 손자를 데리고 큰딸 네로 가서 샤워도 시켜주고 저녁도 챙겨주다 보면 5시 반이 조금 넘어 큰딸이 퇴근을 해서 온다.

두 시간 좀 넘게 손자를 봐주는 셈이다.

육아에 동참을 하면서, 나는 손자에게 되는 것과 안되는 것에 대해 정확하게 교육을 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엄마는 안되고, 할미는 되는 것은 손자를 더 혼란스럽게 할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더군다나 소소한 것에서 손자에게 밀리면 위험한 일이나 절대로 안 되는 일이 생길 때 큰일이 날까 봐서 더욱 그랬다.

모래 위에서 논 날은 머릿속까지 모두 모래투성이다.

그런 날이면 앞으로 손자를 안아 뒤고 젖히고 머리를 감긴다.

손자는 내 옷을 잡고 일어서려고 발버둥을 치고...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며 샤워를 시킨다.

밥을 먹을 때도 혼자 먹겠다는 손자와 아직은 아닌듯해서 먹여주려는 나와의 실랑이가 이어진다.

그래서 늘 주먹밥을 만들어 손으로 먹게 하거나 동그랑땡처럼 만들어 손에 쥐어준다.

그렇게 8개월이 지났다.


하부지~ 하부지...


사람을 알아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손자는 하부지를 유난히 좋아했다.

하부지만 오면 어찌나 좋아하는지 말수 적고 표정이 가난한 남편의 입꼬리가 귀에 걸리곤 했다.

엄마품에 있다가도 두 팔만 벌리면 얼른 하부지 품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갔다.

지금도 여전히 손자는 하부지바라기다.

데이케어로 데리러 가면 나에게 오면서도 멀찍이 서있는 하부지에게로 시선이 고정돼 있고...

하부지가 안 온 날이면, 마지못해 나에게 오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하부지를 좋아하는 손자다.


배신자 손자를 고발하는 할미~


그럼에도 시간이 흐르면서... 손자는 나와도 가까워졌다.

"함미~"소리도 "하비"보다 먼저 했으니까...

'함미'는 곧 '맛있는 맘마'라는 공식이 입력된 손자다.

내가 조리대에 서 있으면 쪼르르 와서 다리에 매달려~ "맘마~~ 맘마~~"한다.

나의 텃밭의 딸기는 모두 손자 차지다.

정성스럽게 물을 주고 그물망을 치고... 빨갛게 익은 딸기를 하나하나 따서 모두 손자에게로 가져간다.

하부지가 안 오는 날은 할미의 무릎에서 떨어지지 않는 그런 손자다.

그런데...

어제 손자가 제일 좋아하는 고기 듬뿍 넣고 영양 고려해서 만든 감자전을 한 판 부치고~ 텃밭 딸기를 따고...

꼬질꼬질한 손자를 데리고 가서 씻기고... 먹이고...

딱 여기까진 좋았다.

딸기를 씻어 꼭지를 따서 한 그릇 하부지에게 주고 먹이라고 했다.

내가 "하부지 먼저 드려야지~"했더니 하나를 얼른 하부지 입에 넣어줬다.

이때다 싶어서 옆에 앉아 입을 크게 벌리고 "할미도 아~~~" 했더니,

부랴부랴 두세 개를 자기 입에 넣고는 할미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결국 나는 한 개도 먹지 못했고, 옆에 있던 하부지가 "할미도 줘야지~"하며 큼지막한 걸로 몇 개 입에 넣어주었다.

그럼에도 손자는 열심히 하부지에게만 줄 뿐....


고것도 배알은 있다~


데이케어에서 오자마자 하부지와 자전거를 타고 놀았는데 할미가 들어와~해서 배알이 꼬였고,

모래 투성이인 머리를 감으며 할미와의 기싸움에서 진 것에 배알이 꼬였고,

저녁을 먹으면서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한 것이 배알이 꼬였고,

빨래대를 흔들다가 할미에게 걸려서 "노 세비!!!"하고 혼이 나서 배알이 꼬인 손자였다.

하부지는 "허허~~"웃기만 하는데 할미만 "노~~"만 하니까...


너무 억울한 할미의 하소연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세비가 아주 웃기지 않아? 어쩜 딸기 하나를 안주냐~"

남편은 그저 웃으며..." 하도 하지 말라고 하니까 그런 거지~ 고것도 배알은 있는 거지..." 했다.

이제 20개월의 손주인데도 살짝 아주 살짝 섭섭하기까지 했다.

자식들도 어미 속을 몰라주는데... 20개월 손자야 오죽할까 싶지만...


육아 선배 할미들의 조언이다.

아무리 키워줬어도 초등학교 들어가면 끝이라고... 손자, 손녀한테도 섭섭한 게 생긴다고... 자식들도 그런데 오죽하겠냐고... 그런데 손자, 손녀는 더 이쁘다고 하며 키워서 그런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이상하게 더 섭섭하다고...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이제 20개월짜리가 딸기 하나 안 줬다고도 섭섭한 마음이 생기는데, 조금 더 지나 "할미 미워~"라고 하기도 하면 말이다.


지금부터라도 마음을 비우는 연습을 해야겠다.

그 잘란 딸기가 내게 준 교훈을 마음에 세기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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