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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zarirang Dec 04. 2019

서서도 받지 못하는 돈

그래도 어쩌면...

2000만원 갚으러 호주로 간 남자, 받자마자 "선물일세" 되돌려준 남자


남편과 운동삼아 이십여분 걸어가면 있는 한인 마트에 가서 이것저것을 사면서 매주 발행되는 한인신문을 가지고 왔다. 

무심코 페이지를 넘기던 나에게 눈에 확 들어오는 기사가 있었다.

바로 '2000만원 갚으러 호주로 간 남자, 받자마자 "선물일세" 되돌려준 남자'라는 타이틀의 글이었다.

그때까진 그냥 사진과 큰 기사만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보던 나는 황급히 돋보기를 찾아 썼다.

"선물일세"라고 되돌려준 분도 멋지지만... 호주까지 날아가서 "돈 갚으러 왔습니다"라고 한 그분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교민사회에도 별의별 사건사고는 다 있다


이곳에서 24년을 살았다.

살면서 한국에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다양한 일들이 내 주위에서 일어났고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옆에서 보기도 했고 귀동냥으로 듣기도 했다.

'부부끼리 4명이 골프를 치다가... 이쪽 남자와 저쪽 여자가 바람이 나서... 결혼을 하고... 양쪽의 남자와 여자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오클랜드에서 있었던 이야기라며 처음 이곳에 와서 만난 부부가 들려준 이야기였다.

그리고 얼마가 지났을까... 그 이야기를 들려준 분이.... "어머어머... 내가 그때 이야기한 그 바람나서 재혼했다는 부부... 글쎄 이곳 쇼핑몰에서 봤어~ 오클랜드에서 살기가 좀 그러니까 이곳으로 내려왔나 봐~ 나를 보다니 얼른 가더라고..."  그 후... 그 부부의 소식은 다시 교민사회에서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아는 지인을 만났으니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만 무성했을 뿐.....


한국으로부터 유학생들과 워크 비자로 젊은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던 어느 해...

유학 온 외로운 고등학생들과 축구를 하고 농구를 하며 후배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던 어는 청년이...

한국에 급한일이 있어서 잠깐 갔다 올 거라고 하면서 학비로 보내온 학생들의 돈을 적게는 몇백 불에서 많게는 만불이 넘는 돈을 모두 끌어 모아 튀었다.

아이들은 믿었던 형에게 뒤통수를 맞은 격이니... 돈보다는 신뢰가 무너졌을 것이고...

아마도 살면서 다시는 누군가를 믿지 못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24년간 귀동냥으로 들은 에피소드만 쓴다고 해도...

아마 브런치 북 한 권은 족히 나오지 않을까 싶다...


P와의 만남


나와 남편은 하던 일의 특성상 한번 신뢰를 쌓으면 그 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며 살아왔다.

우리에게 P는 그런 사람이었다.

한국에서 기자였다는 P는 이곳에서도 같은 일을 하며 자기만의 영역을 만들어 가고 있던 아이가 둘이 있는 30대 가장이었다.

이곳에서의 기사를 한국으로 보내기도 하고, 한국에서 의뢰를 받은 방송을 이곳에서 만들어 보내기도 하고, 한국에서 온 PD나 방송 관계일을 하는 사람들이 오면 함께 작업을 하기도 하는 그런 일들을 했다.

큰 딸이 '밀레니엄 차세대 리더'라는 제목으로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만든 한국 모 방송의 프로그램 '뉴질랜드 편'에 출연이 결정되면서 그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 후에도 한국에서 PD들이 오면 큰 딸이 통역도 해주고 이곳 시장과의 인터뷰 등을 주선해 주기도 했었다.

남편에게 큰 형 같다고도 했고 가족끼리 모여 저녁을 먹기도 하며, 외로운 이민생활에서 또 다른 가족으로 여기며 지냈다.

세월이 흘러...

그의 가족은 오클랜드로 이주를 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났을까~ 조금은 다급하게 연락이 왔다.


3개월만 쓸게요~


오클랜드에서 한국과 연관된 사업을 시작하는데 급하게 돈이 필요하다는 연락이었다.

그때가 2009년 4월경이었다.

마침 우리 가족은 두 딸들이 오클랜드에서 열리는 전국 한국학교 대표들이 모이는 '나의 꿈 말하기 대회' 뉴질랜드 결선에 참여하기 위해 오클랜드로 갈 계획이 되어 있었던 터였다.

그래서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기로 했다.

P는 공항까지 마중을 나왔고 1박 2일 동안 오클랜드 관광도 시켜주었으며 저녁 늦게까지 P의 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온 가족이 모여 그동안의 오클랜드 생활에 대해 듣기도 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사업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도 들었다.

그러면서 딱 3개월만 필요하다고 하며 꽤 큰돈을 빌려달라고 했고... 우리는 큰딸의 다음 해 등록금과 생활비이기 때문에 12월까지는 꼭 돌려주었으면 한다고 하며 흔쾌히 빌려주기로 했다.

그동안 건실하게 살았던 P와 두 어린 자녀들 그리고 그의 부인을 믿었고 새롭게 하고자 하는 그 사업이 잘돼서 이곳에서 잘 정착해 살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P는 우리가 요구도 하지 않았는데도 '차용증'까지 써서 우리에게 주었다.

우리는 웃으며 서로 믿고 빌려주는 건데 이런 게 뭐 필요가 있냐고 했고...

그렇게 그와 그의 가족이 잘 되기만을 바라며 오클랜드에서 돌아와서 바로 돈을 송금해 주었다.


앉아서 주고 서서 받는다고 했던가?


그 후에 몇 번 소식을 주고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해 12월이 되기 전에 그는 우리가 사는 지역으로 와서 아무래도 돈이 더 필요하다고 말을 흐렸던 것 같은데 대 놓고 더 빌려달라고는 하지 못하고 돌아갔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10년이 되었고...

더는 그에게 소식도 오지 않았고 우리도 그를 찾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3년 전에 우연히 그에 대한 소식과 함께 연락처를 알게 되었다.

남편에게 한번 연락을 해 보면 어떨까 물어봤다.

물론 남편은 "그냥 둬~ 돈 갚을 사람 같으면 전화를 안 해도 벌써 갚았지... " 라며 말끝을 흐리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남편도 그로 인해 상처가 깊구나 하는 것을... 그리고 신뢰라는 소중한 것에 생채기가 났다는 것을...


10년... 올해로 법적 채무면제...


기사를 보고 첨으로 알았다.

지인에게 돈을 빌려줬을 경우 채무가 면제되는 소멸시효가 10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2009년에 돈을 빌려주었고 올해가 2019년이니... 그것도 4월경이었다면 벌써 지나고도 몇 개월이 지나버렸다.

아등바등 받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남편은 그 후에 입 밖으로도 그 일을 꺼내지 않았고, 나만 돈이 궁해지면 가끔 구시렁구시렁거리곤 했다.

"그 돈이면..." 하면서 그에 대한 '신뢰'라는 것을 떠나서 단지 '돈'이라는 것에 아쉬움을 토로하곤 했던 것 같다.


아래의 기사처럼...

어느 날 벨소리가 울리고... 이제는 훌쩍 커 버렸을 두 아이들과 함께  "형님~ 제가 좀 늦었지요... 이제야 왔네요..." 라며 계면적게 웃으며 서 있는 P의 가족을 상상해 본다.

"선물일세" 하며 돌려줄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나도 신문사에 기고를 해야겠다.

'세상에 이런 일이~'라고 하면서...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면... 10년간 상처가 나서 쉽게 입에도 올리지 못한 '신뢰'라는 소중한 것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올 수도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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