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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eric Kim Sep 07. 2019

3000원짜리 와인의 행복

아르헨티나 멘도사(Mendoza), 스페인 리오하(Rioja)


'이것'은 인간을 바보로 만들기는 해도 악한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야기한 잠시 동안의 다툼은 오래 지속될 수백의 애정을 만듭니다. 일반적으로 '이것'을 마시는 사람은 진심과 솔직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은 거의 모두가 선량하고 올바르고 정의롭고 충실하며 용감하고 정직한 사람들입니다.-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달랑베르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음료는 무엇으로 하시겠어요?"

"저는 화이트 와인이요!" "저도 같은 걸로 주세요."

상냥한 미소의 레스토랑 직원분의 질문에 우리 부부가 동시에 대답한다.

첫술에 배부를 듯한 인심 좋은 사이즈의 애피타이저와 함께 와인 한 병이 나온다.


이제는 익숙하지만, 우리가 작년 이맘때쯤 처음 이 레스토랑에서 '오늘의 메뉴(menu del dia)'를 주문했을 때, 우리는 병 채로 나온 와인을 두고 순간 망설였었다.

'이걸 양껏 한잔만 따르고 그 자리에 두라는 건가, 아님 다 마시라는 건가??' 고민하며,

눈치껏 식당 안의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나서야  알았었다.  다 마셔도 된다는 것을.


주변을 둘러보면 거의 대부분의 식당 손님들의 테이블에 와인 한 병씩 놓여있다.

10유로가 조금 넘는 금액에 코스 요리와 와인이 함께 나오는 점심 식사를 각자의 속도와 리듬에 맞춰 즐기는 모습은 이곳의 평범한 외식 풍경이다.

와인 한잔씩 해가며 옆 테이블에 앉은 이방인 커플인 우리에게 서슴없이 말도 걸어주고,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도 나눈다.


2018년 봄, 스페인 리오하(La Rioja)

"어?! 이거 계산이 잘못된 거 같은데요?"

무뚝뚝한 듯, 그리 친절하지도 그렇다고 딱히 불친절하다고 할 수도 없는 태도의 여자 바텐더에게서 건네받은 계산서를 보며, 남편이  말했다.

"그거 맞는 금액이에요. 거기 보면 와인 한잔 당 금액 나와있잖아요. 그거 맞아요!"

약간은 짜증 섞인 투로, 바텐더가 받아쳤다.

"레드와인 한잔이 99 센트라고 찍혀있는데, 이게 정말 맞다고요?!"

믿기지 않아 재차 묻는 남편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던지, 그전까지 무표정했던 그녀가 호탕한 웃음을 웃어 보였다. 그리고 한마디 하길,

En Rioja tenemos vinos buenos y
vinos mejores.
(여기 리오하에서 와인은 딱 두 가지예요. 좋은 와인, 그리고 더 좋은 와인!)


작년 봄 스페인 리오하주 로그로뇨(Logroño)에 서 현지인들의 아지트처럼, 꾸밈없이 소박해 보이는 동네 선술집에 들렀을 때의 이야기다.

'이곳 사람들이 주로 마시는 와인 한잔씩 주세요!'라고 주문한 후 받아 든 레드와인 맛이 무척이나 황홀했던지라, 우리는 당연히 한잔에 아무리 싸도 3유로는 될 거라고 짐작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질 좋은 와인 가격이 99센트라니 놀라서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스페인, 라 리오하(La Rioja)지역의 vineyard.


2014년 1월, 아르헨티나 멘도사(Mendoza)

반쯤 채운 플라스틱 잔을 입에 대는 순간, 농후하게 익은 살구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그 향 금방 달아날까 입안에 잠시 머금고 있자니 바닐라향을 닮은 부드러움이 입안을 감쌌다. 목으로 넘어가는 순간의 녹차 같은 쌉싸름한  맛.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저녁에  출발한 야간 버스를 타고 15시간쯤 걸리는 멘도사로 향하는 길.

버스에서 보통의  항공기 기내식보다 더 훌륭한 음식을 제공받았었다. 부드러운 소고기 요리와 함께 나온 아르헨티나 대표 레드와인 말벡(Malbec).

그 달콤 쌉싸름한 맛과 기분 좋게 오른 취기 덕분에 밤 버스의 불편함이 사르르 녹았더랬다.


"그 레스토랑에 가면 밀라네사(Milanesa)랑 또론떼스(Torrontés)를 꼭 시켜야 해. 먹고 마셔보면 알 거야. 이것이 멘도사의 맛이란 것을!"

우리가 머물고 있는 숙소의 이보다 더 친절할 수 없는 직원 '하비(Javi)'가 꼭 가보라고 신신당부한 현지 레스토랑에 저녁을 먹으러 나간 우리.

저녁식사 시간이 늦고 길기로 유명한 아르헨티나인지라, 저녁 9시가 거의 다 된 시간에 저녁식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돈가스와 거의 비슷한 비주얼의 소고기가스 '밀라네사'와 멘도사 사람들이 사랑하는 '또론떼스' 화이트 와인을 한 모금 하는 순간 저절로 탄성의 소리가 새어 나왔었다.

"와우와우 와우~~"

한여름의 습한 더위를 단숨에 날려준 그 시원함과 입안 가득 퍼지는 자몽과 벌집의 맛을 뒤섞은듯한, 수줍게 단맛을 내는 듯 아닌듯한 매력적인 와인 맛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와인 한잔에 살짝 콩깍지 씐 눈을 하고서 레스토랑 주위를 둘러보니 10시가 다 된 시간인데 이곳 사람들 만찬의 분위기는 이제 막 무르익어가는 듯 보였다.

할머니부터 손자까지 3대가 함께 온 가족, 직장 동료들과 또는 친구들과 즐거운 금요일 저녁을 먹는 그들의 식탁에도 우리처럼 와인 한 병씩은 빠지지 않고 놓여있었고, 그들 모두의 표정에는 만족과 행복이 묻어있었다.


아르헨티나 멘도사(Mendoza)의 vineyards, 그리고 Torrontés.


보편적이고 어느 누구도 배척하지 않으며 모두가 함께 공유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값싼 화이트 와인 '라보(Lavaux)'를 사랑했던 루소처럼

스페인, 아르헨티나 사람들도 그들에겐 평범한, 질 좋고 비싸지 않은 그들의 와인을 사랑한다.


누군가가 바르셀로나에 사는 재미가 뭐냐고 묻는다면,

3000원짜리 와인 한 병에

해외 살이 희로애락

술술 넘기는 맛에 산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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