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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eric Kim Sep 09. 2019

화산 같은 산후 우울증

칠레 푸에르토 바라스(Puerto Varas) 오소르노 화산


오랜만에 서울에 살고 있는 지인에게 안부 메시지를 보냈다. 새해 첫날 출산한 그녀.

몸은 좀 어떠냐는 내 안부 인사에 몸은 괜찮은데 정신이 아프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감정조절이 잘 안돼요 요즘. 갑자기 눈물이 나고 짜증이 나서 미치겠고 ㅡㅡ;;;

멀쩡할 땐 왜 그랬지 싶고...

근데 웃긴 게 일주일에 두 번은 술도 조금 마시고, 밴드도 하고 월요일은 가끔 점심도 먹으러 나가고 문화센터도 다니고 하는데;;; 해소가 안되네. 나가서 놀 때뿐이고...

다른데 관심을 돌려보고자 여행 관련한 팟캐스트 같은 것도 듣는데..."


갇혀버린 듯한 기분이 들 때가 많다고 했다. 그러다가 그 감정이 극에 달하면 어김없이 한 번씩 폭발하고 만다고.

언제 터질지 모를 강한 열을 몸 안에 품고 사는 듯한 그녀의 모습이 그때 그 화산을 닮았다.


오소르노 화산(Osorno Volcano)
푸에르토 바라스(Puerto Varas) in 칠레

'흠... 가볍게 시작할 발걸음은 아니군!'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 문서(waiver)에 이름, 국적, 여권번호를 순서대로 적은 후 종이 하단에 사인을 하고 나니 기분이 묘해졌다.

천만분의 일의 확률이라도 혹시나 폭발이 발생하게 되면, '나'라는 존재가 이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려줄 유일한 증표인 그 종이를 가방에 꽂았다.


검은 가루로 덮인 길은 걸을 때마다 푸석푸석한 먼지를 일으키고, 길 옆으로 자라는 이름 모를 식물들은 죄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길이 전하는 무거운 메시지 때문일까?!

이 길을 걷는 사람이 우리 외엔 아무도 없었다.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머리는 산을 오를수록 무거워졌다.

화산의 강한 기운에 홀린 듯, 꼭대기만 바라보며 걷고 또 걷는 나를 발견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정상에 오른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은 무언가에 끌린 듯 자꾸만 위로 위로 향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더 오르려고 욕심부리는 나를 막아서며 남편이 말했다.

"이만큼 올랐으면 많이 했다. 이제 그만 멈추고 앉아서 쉬자. 우리 지금껏 계속 정상만 보고 걸었잖아. 그러니 이제 여기까지만!"


머리에는 묵직한 빙하를 눌러쓰고, 좌우로 눈물샘 같이 깊은 두 개의 호수를 품은, 키가 2652m나 되는 활화산 '오소르노(Osorno Volcano)'. 

 산을 오르는 길 위에서 화산의 존재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엄에 압도당한 나는, 한동안 내 안의 자제력을 잃은 채 스스로를 한계점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낮게 더 낮게...

자신을 최대한 낮추어 강한 비바람에도 쉬 흔들리지 않게 몸을 보호하는 작디작은 식물들이 눈에 들어온 건 걷기를 멈춘 후였다. 이 척박하고 혹독한 환경에서도 봄이 오면 꽃을 피우고 가을에는 씨를 맺었겠지. 그렇게 수천 년의 시간 동안 대를 이어 이 터를 지키고 있었으리.

언젠가 화산의 생명이 끝나고 난 후, 더 비옥해질 대지를 기다리며.


'이걸 놓치고 있었구나!'

하산하려고 몸의 방향을 바꾸는 순간, 눈 앞에 펼쳐진 비경을 보니 '아차!'싶었다.

화산의 화를 식히려 그 곁에 자리한 눈물샘 같은 호수 '또도스 로스 산토스(Todos Los Santos).

그 풍경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이 뻥 뚫리고 머리가 맑아져 옴을 느꼈다.


올라갈 때는 안 보이던 것들이 내려오는 길에선 많이도 보였다. 호수를 배경으로 땅에 꽂혀있는

막대기 하나.

그 막대기에 적힌 글자- DESOLACION.

'적막함, 음침함'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이 길의 이름이자, 이 곳의 분위기이다.

그리고 막대기 끝 지점에는 형광색이 칠해져 있다. 갑자기 안개나 먹구름에 휩싸여

내려가는 길이 보이지 않게 되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형광 빛 따라오라고.


우리 마음속에도 저런 막대기 하나 있으면 싶다.

마음이 갈 곳을 잃고 헤맬 때, 나가는 길 찾게...


호수 풍경과 사뭇 대조적인 이름 'DESOLACION'.


신경정신과 진료 예약을 해놓았다고 했다.

필요하다면, 약물치료도 받을 생각이라고 했다.

자기 자신을 위해 그리고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내가 늘 응원할 테니 힘을 내라고 전했다.

무조건 잘 먹고 잘 자야 한다고도 말했다.

엄마인 우리가 살아야 아이도 산다고...


성난 그녀의 마음이 언젠가 이처럼 고요하게 빛나길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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