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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eric Kim Sep 12. 2019

골목과 사랑에 빠진 두 남자

우루과이 콜로니아 델 새크라멘토, 스페인 그라나다


길 위에 검은 조약돌이 아침 햇살을 만나 눈부시게 반짝인다. 낮은 담장 너머로 살포시 고개를 내민 부겐빌레아(bougainvillea)의 핑크빛 얼굴에서 수줍음이 번져 나온다.

슬레이트 지붕 아래에 세월의 흔적으로 반죽된 바랜 연분홍 벽 사이로 키 작은 대문이 활짝 열려있다. 


안으로 들어서니 아담하니 소박한 파티오(patio) 바닥에 심심해서 졸린 고양이가 사람 따위엔 관심 없다는 듯 널브러진 자세로 우리를 맞이한다.

파티오를 둘러싼 담벼락에는 무성하게 자란 담쟁이덩굴  사이사이로 형형색색의 나무로 만든 물고기들이 고양이의 관심을 기다린다.


생선가게를 만난 고양이가 된 것 마냥, 흥분된 마음 가득 안고 그의 방 안으로 들어선다.


Calle de Los Suspiros 58, Colonia del Sacramento, Uruguay (우루과이, 콜로니아 델 새크라멘토, 로스 서스피로스 길 58번지.)


그 골목, 그 집에 사는 한 남자.

Fernando Fraga(페르난도 프라가)

1972년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Montevideo)에서 태어난 프라가.

어려서부터 그림에 두각을 나타낸 그는 몬테비데오에서 유명 화가들로부터 정통 미술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학창 시절 어느 날. 습작 수업의 일환으로 방문한 콜로니아 델 새크라멘토에서 그는, 그의 그림에 배경이 되었던 '그 길, 그 집'과 사랑에 빠졌.

수년의 기다림 끝에 나이 서른이 되던 , 2002년에 드디어 그토록 사모하던 그곳에

그와 그의 작품들이 뿌리를 내렸다.


그의 작품세계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유사한 색채의 배합을 통해 절제된 감정을 표현하는 그의 그림은 전통적 회화 기법에 따라 정물, 사물, 특히 여자에 집중되어 있다.

어두운 색을 선호하지만 과하지 않아 우울함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선(lines)에 집중하지만 적절한 색의 조합을 통해 우아한 변화를 이끌어낸다.


그의 뮤즈(Muse)들의 매력에 빠져, 그 집에 아주 오래 머물렀더랬다.


프라가의 뮤즈들.


포르투갈풍 랜치하우스(Ranch house: 일종의 오두막집)의 오래된 돌벽이 그의 작품과 오묘한 조화를 이룬다.


해변을 향하는 길에 서있는 프라가의 뮤즈들.



콜로니아 델 새크라멘토(Colonia del Sacramento) in 우루과이


아르헨티나의 동쪽, 브라질의 서쪽에 위치한 남미의 작은 나라 우루과이, 그 안에서도

작디작은 도시, 콜로니아 델 새크라멘토.

17세기에 만들어진 이 도시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랜 시간 스페인, 포르투갈, 브라질로부터 빼앗기고 되찾길 반복한 전쟁의 역사와

식민지배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구시가지와 역사지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구시가지에 위치한 

'그 길(Calle de los Suspiros)'

콜로니아의 상징이자 자존심이며, 

수많은 예술가들의 그림 속에 담겨 있다.


콜로니아의 전쟁역사를 대변하는 종탑 옆 무너진 벽과 오늘을 살아가는 도시의 풍경, 그리고 저녁 노을.


알람브라 궁전(Alhambra Palace)을 마주하고 있는 언덕에 자리 잡은 옛 유대인들의 마을, 레알레호(Realejo).

그곳에서 뻗어져 나간 수많은 골목들에 매료되어 걸음을 멈추었다. 생동감이 넘치는 저마다의 독특한 표정을 하고 있는 골목에 마음을 빼앗긴 채 한참을 앉아 있다 보니 어디선가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재잘거림에 이끌려 가보았더니,

열 살 남짓 되었을 동네 아이들 여럿이 언덕길 계단을 오르내리며 신나게 놀고 있다.

계단 옆으로 빼곡하게 들어선 집들의

새하얀 벽을 통해 반사된 빛을 난로 삼아 쌀쌀한 날씨에도 굴하지 않고 노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생각이 한 곳에 멈췄다.


1990년대, 이 동네(Realejo) 골목을 캔버스 삼아 놀았던 악동이 한 명 있었더랬다.


골목이 스승이자, 작품이라 말하는 남자.

Raúl Ruiz (라울 루이스)

그라나다가 낳고 레알레호의 백색 벽들이 키운,

라울 루이스.

그의 유별난 골목길(the streets) 사랑은 그가 11살 때부터 시작되었다.

새하얀 벽에 이름 낙서하는 것으로 시작된 그의 그래피티(graffiti)는 그가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과 함께 점점 무르익어갔다.

대학에서 미술을 1년 반 동안 공부했지만, 자기의 스승은 '골목길'임을 깨달은 루이스.

학업을 중단하고 소신 있게 자신만의 길을

가고 있다.


그런 그가 말했다.

"예술가에게 살아갈 돈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작품이 갤러리에 전시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그래피티가 아니다.

그래피티는 모든 사람의 경험을 위해 길 위에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의 작품은 골목길 임을 명심해야 한다.

골목길은 모든 영감의 원천이다.

우리가 골목길(the streets)을 잃으면,

길(the way)을 잃는 것이다."


한 편의 이야기가 있는 그림으로, 또는 전하고픈 메시지를 담은 그림을 통해 열린 세상에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데 주저함이 없는  남자.

그런 그의 그래피티가 볼 때마다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다른 그래피티와 급이 다른 것은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간미에 있을 터다.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을 패러디한 그림의 밑바탕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고 한다.

Cansado de no encontrar respuestas, decidí cambiar mis preguntas.

             답을 찾지 못하는 것에 지쳐서,

         나는 내 질문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이런 그를 어찌 악동이라 부르지 않을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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