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eneric Kim Sep 14. 2019

흥행에 실패한 기대작

태국 코 피피, 아르헨티나 비야 라 앙고스투라


"자기 자기! 이번에 내가 예약한 숙소들 중에서 최고로 멋있는 곳에 우리 이제 곧 갈 거야!

기대해도 좋을 거야~"

개구쟁이 마냥 잔뜩 들뜬 어투로 남편이 말했다.

숙소에 대한 평가도 별 다섯 개였고, 아주 미리미리 예약한다고 서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이미 예약이 많이 차 있었다는 부연설명과 함께, 본인이 아주 장한 일을 했다며 어깨에 힘 잔뜩 들었던.


"짜자잔~~ 봐봐!

완전 자연과 조화롭게 어우러진 이름 그대로

'에코 하우스(Eco House)'이지?"

산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야심 차게 준비했다며, 숙소의 실체를 보여주는 남편의 목소리는 한층 더 업되었다.

'음... 내가 산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내가 정글을 좋아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는데...'

생각하며, 그래도 숙소 예약하느라 소중한 자기 시간 할애했을 남편의 노고에 진심 어린 칭찬을 보내며, '에코 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코 피피(Koh Phi Phi) in 태국

아주 오래전 어느 날.


"우웩...?!...ㅠㅠ"

아침에 눈뜨자마자 화장실을 가려고 침대를 벗어나 바닥에 발을 딛는 순간, 발바닥 감각세포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빛의 속도로 입으로 전달된 외마디!

뭔가 밟아도 제대로 밟았다.

밤새 우리 '에코 하우스' 루프탑에서 제대로 파티가 있었는지 너무 신나게 놀다 흥분을 주체 못 한 그 어떤 동물이 제대로 지려놓은 흙갈색 저지레를 그만... 밟고 말았던 것이다.

순간 기분은 몹시 나빴지만,

모르고 밟으면, 그날 운세가 좋을 거라는 미신을 믿어보기로 하고 기분 풀었다.


그날 오후.


"아아악!!! 자기! 저기 저거... 아아악!!!"

'에코 하우스' 옆에 자라고 있는 덩치 큰 나무를 구렁이 만한 뱀이 온몸을 휘감으며 올라가고 있는 걸 본 순간, 나는 내가 기절하지 않고 소리를 지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했다.

"왜? 왜?? 뭔데 그래?"

뱀보다는 내 목소리에 더 놀란 남편은 나를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애쓰며, 본인은 뱀 따위엔 놀라지 않는 척을 했다.

그런 남편의 모습에 나는 또 놀랐다.

사실, 우리 부부 중에 곤충 및 벌레 퇴치 담당자는 남편이 아니고 나 다.

아주아주 아주 시골에서 나고 자란 나름 씩씩한 나는 웬만한 것에는 호들갑 떨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본 생물들이 자기 몸 다칠까 전전긍긍이지.

그런 용감한 내게도 천적이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뱀이다!


뱀과 나의 흑역사는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 데,

여름 방학이 거의 끝나가던 어느 날. 나보다 두 살 위인 울 오빠는 아직 익지도 않은 밤을 따러 가겠다며 손에 막대기 하나 들고 슬리퍼를 신은 채로 집 앞 밤나무 숲으로 향했다.

그러고 나서 10분도 채 지나지 않은 때, 우리 가족은 오빠의 비명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랬다. 오빠는 독사에 뒤꿈치가 물리는 끔찍한 일을 당했고 거의 한 달간 병원에 입원했었다.

한 달 전 일도 잘 기억 못 할 정도로 장기 기억력이 거의 바닥 수준인 내게 그 어린 날 일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는 건 그만큼 나한테는 큰 충격이었음을 보여주는 거다.

내 이 오랜 기억만큼이나 나는 뱀을 싫어한다.


그날 밤.


"으아아아악~~ 이게 뭐야???"

이번엔 남편이 놀라서 내는 소리에 내가 잠이 깼다.

도대체 또 무슨 일인 건지 남편에게 물었더니,

한창 자고 있는데, 자기 목으로 무언가가 감겨 올라오는 느낌에 화들짝 놀랐단다.

낮에 뱀 보며 쿨한척했던 게 그야말로 '척'이었던 걸로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음... 그건 당신 목 감싸려던 내 손이었어...'


다음날 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잠 못 드는 밤 비가 내린 게 아니고 비가 너무 내려서 잠들 수가 없었다.

천둥의 신 토르가 번지수를 우리 숙소로 콕 찍었는지, 그가 몰고 온 열대성 스콜(squall) 4종 세트는 밤새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천둥, 번개, 비, 바람이 에코하우스를 흔들고 때리고 적셨다. 번개는 한번 칠 때마다 불이 번쩍번쩍 이는 바람에, 우리는 '이 비와 바람을 온몸으로 맞고서라도 에코하우스를 떠나는 게 더 안전한 게 아닌가' 하는 고민을 정말 오랫동안 했었다.


이러한 연유로, 남편의 에코 하우스는

에고... 하우스로

우리 기억 속에 평생 머무를 예정이다.


남편의 야심작이었던 에코하우스는...

정글 속에 자리 잡은 그 에코하우스는 실제로 그곳에 자라고 있는 덩치 큰 나무들을 기둥 삼은, 나무 위에 지은 집

'트리하우스(TreeHouse)'였다.

지붕은 야자수 잎을 엮어 여러 겹으로 덧댔으며, 굵은 대나무로 바닥과 벽을 채운, 이름 그대로 자연의 재료만으로 지은 자연인의 집이었다.

이런 에코하우스에 사람만 사는 게 아니고 그곳 생물들도 함께 살고 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고, 자연재해의 위험에도 쉽게 노출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에코하우스 대신 코피피섬 로무디 해변(Loh Moo Dee). 롱비치를 지나 등산을 좀 해야 나오는곳.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에코하우스 대신 하루종일 우리 둘이 전세 냈었다.


몇 년 후.


"자기~ 이 숙소는 정말 내 야심작이야!

집 앞에 예쁘게 가꿔진 정원이 산과 어우러져 있고, 저녁엔 우리 바비큐도 할 수 있어. 기대하시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모두 갖춘 완벽한 숙소를 예약해두었다며 남편은 그 숙소 자랑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하고 또 했다.

집주인이 직접 건축, 설계 및 인테리어까지 다 맡아서 최근에 완성한 집주인의 마스터피스라며.

듣고 있자니, 나보다는 언젠가 본인이 디자인한 집을 자기 손으로 짓고 싶어 하는 남편 자신을 위해 예약한듯한 냄새가 스멀스멀 났지만, 남편에게 좋은 게 내게도 좋은 것이니 기대 잔뜩 품고.


비야 라 앙고스투라(Villa la Angostura) in 아르헨티나


"우리 오늘 안에 그 집에 도착할 수 있기는 할까?"

차 탄지 30분이 지났을 때, 참다 참다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한 내가 남편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남편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택시 기사님께 조심히 물었다.

"GPS상에 너희들이 알려준 그 집, 그 주소 자체가 뜨질 않아. 일단, 가장 가깝게 잡히는 주소로 가서 그곳에서 정확한 길을 물어보고 가야겠어."


'구름과 함께 고요한 아침을 맞이하는 집,

최근에 지어진 깨끗한 새집... '

머리를 굴려 그 집에 대해 들었던 정보들을 조합해보니 기사님이 일부러 돌아 돌아가려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기사님과 우리 커플의 인내력이 결실을 맺어 다행히 도착한 그 산속 전원주택.

집주인이자 건축가인 파블로 아저씨의 한 시간에 가까웠던 장황한 집 사용설명과 건축 후기를 간신히 끊고, 짐을 풀었다.


"어?! 문이 안 열려!"

저녁식사로 고기를 구워 먹고야 말겠다는 우리의 계획은 그릴이 놓여있는 정원으로 가는 유일한 문이 열릴 생각을 않는 관계로 포기되어졌다.

분명히 파블로 아저씨가 집 구경시켜줄 때는 열려있었던 그 문. 거실에서 정원으로 통한 그 문.

파블로 아저씨가 떠날 때 닫고 갔던 그 문...

30분 넘게 콜라병 처음 본 부시맨 마냥 이것저것 만져가며 열어보려 애썼으나, 더 하다간 문 유리 깨고 말 것 같아서 그만뒀다.

밖에 놓인 그릴은 그림의 떡이었다.


"아! 나 진짜! 더 이상은 못 참겠다!!!"

근처 호수에서 시간을 보내고 그 산속 전원주택으로 돌아오던 길에 내 인내력은 마침내 바닥을 드러냈다.

걷는 행위 자체가 힘들었다거나 날씨가 너무 더웠다거나 모기가 많았다거나... 그런 거면 차라리 나았을 테다.

비포장도로 위를 차가 지날 때마다 이는 흙먼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뒤집어쓰고 심지어 그 먼지를 들이마시며 걷는다는 것.

상상 그 이상으로 힘든 일이었다.

그랬다. 그 산속 집으로 가는 길은 메마른 날씨 탓에 먼지가 가득했던 자연 그대로의 비포장길이었다.

'먼지'라는 단어 앞에 '미세'가 안 끼었어도,

그냥 '먼지'라는 명사 자체에 거부감이 큰 게 나만 그런 건 아닐 테다.


비포장길을 자꾸 걸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이 호수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서...


'기대는 미리 예고된 분개이다.(Expectations are premeditated resentment.)'라는

표현이 있다.

적당한 기대는 몸에 좋은 에너지를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뭐든 지나치면 해롭다.

기대도 마찬가지다.

작가의 이전글 골목과 사랑에 빠진 두 남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