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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작 Mulgogi May 23. 2022

비는 소염작용을 한다.

더블린 날씨와 에쿠니가오리에 대한 단상

아일랜드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 싸인 섬나라이고 더블린은 한국의 제주도만큼 날씨가 변덕스럽고 비가 자주 내린다. 그래서 날씨로 안부를 물을 때 We have Irish weather라는 표현을 종종 쓰곤하는데 재치와 운치가 곁들여진 멋진 표현이다.

     

비는 소염작용을 한다.     

일본 여류 소설가 에쿠니 가오리의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를 집어 들고 온 2005년 5월 4일. 그날 이후 내게는 버릇이 하나 생겼다. 비가 오는 날이면 늘 이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곤 한다. 비는 소염작용을 한다,라고.     


우리에겐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로 잘 알려진 에쿠니 가오리는 결혼과 연애에 대해 달콤하면서도 허무주의적 입장으로 풀어내는 일본 3대 여류 작가다. 이 책에서 그녀는 결혼 2년 가을에서 3년 가을까지 자신의 결혼생활을 테마로 글을 썼는데 <비>에 관한 챕터에 나오는 글구다.


비는 소염작용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가령 감정의 기복ㅡ예를 들면 연애ㅡ이 어떤 유의 염증이라고 한다면 비는 매우 위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말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나만 슬퍼하지 않아도 될 거 같아서 일 년 내내 비가 오길 바라던 날들이 있었다. 슬프고, 찬란했던. 다소 이기적인 마음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못하고 마치 내 마음을 대신 고백하는 듯한 레이첼 야마가타 (Rachael Yamagata)의 Over and Over를 수차례 돌려 들었다. 그녀가 노래를 통해 내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기 때문에 그녀의 노래를 듣는 동안 매일같이 반복해서 비가 오길 바랐다. 

     

Over and Over

Over and Over

Over and Over

.

.

.     

누구나 저마다의 이유로 비를 좋아하거나 싫어한다. 내 경우엔, 비가 내리면 나만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슬픔을 가누지 못해 흘러내릴 눈물이 들키지 않아서 비가 내리는 게 좋았다.


비가 내리면 누구나 그리운 이 한 명은 있겠지. 아무리 마음이 차고 견고한 사람이라 해도 가슴속에 그리운 이 있다면, 적어도 나 혼자 슬퍼하지 않아도 될 거 같았다.     


토독 토도독. 

빗방울과 창문이 만나는 시간, 비는 창문을 위로하는 동시에 나를 위무(慰撫)한다.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버릇이

’언젠가‘라는 희망을 품고 오래도록 해후를 기다리는 버릇에게.     

오늘도 비는 위로를 건넨다.     


자주 배앓이를 하던 어린 손녀에게 외할머니는 강아지처럼 희고 작은 손녀의 배를 어루만져 주며 ’ 할머니 손은 약손 강아지 배는 똥배‘라는 재밌는 노랠 불러주셨다. 사르르 매만져 주는 할머니의 손길(사랑)을 느끼며 스르르 잠이 드는 것이 어찌나 좋았던지. 이후에도 어린 손녀는 배가 아프지 않을 때조차 짐짓 아픈 척하며 ‘할매, 내 배 아프다. 배 만져 도.’라는 말을 했다.     


자신은 한없이 낮은 곳으로 떨어지면서 그 손길은 아프고 상처 많은 사람들의 위무로 향하는 발걸음이 유년 시절 할머니의 손길을 닮은 위로 같다.


우리가 살면서 주고 받은 것이 

서로 상처인 줄도 모르고, 서로 사랑인 줄도 모르고

그저 담담히 받아들였던 거리의 수많은 상처받은 마음들을

살포시 덮어주는 비는 오늘도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넨다.


토독 토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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