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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작 Mulgogi Jul 06. 2017

우리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길을 걷는다

CAMINO DE SANTIAGO

St.Jean-Pied-de-Port/Roncevaux

+ 1Day / 2016.07.05

: 27.1km (Iphone record : 30.8km)

휘가 예약한 알베르게(Albereuge: 순례자를 위해 기부나 저렴한 비용의 숙박시설)는 마을 끝에 위치했고, 내가 도착했을 땐 아침 이른 일정을 시작하는 순례자들을 위해 침실은 이미 소등된 상태였다. 고맙게도 휘와 베드로는 내가 도착하면 문을 열어주기 위해 깨어 있었다. 


캄캄한 침실에는 열댓 명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었고 개중에는 코를 드르렁거리는 사람도 있다. 겨우 내 몫의 침대를 찾았지만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사람들이 깰까 봐 배낭을 들고 침실 밖으로 나왔다. 테라스에는 자고 있는 순례자들의 것으로 보이는 많은 배낭들이 일렬로 세워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휘와 베드로는 테라스의 벤치에서 자신의 배낭을 마저 챙기는 중이다. 나는 간단히 세수와 양치질만 하고서 베드로의 맞은편에 앉았다. 마치 군인의 느낌이 물씬 드는 목소리로 "안녕하세요. 초면에 이런 걸 물어도 되는지 모르겠어요."라며 멋쩍어했다. 곧이어 베드로는 "왜 걸으세요? 왜, 이 순례길을 걸으시려는 거예요?"라고 물었다. 생장으로 오는 여정이 너무 고됐던 나는 "그건 내일 차차 이야기하도록 하죠."라고 짤막하게 답하곤 침실로 들어왔다. 캄캄한 침실에서 나는 오늘의 고단함을 달래며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우리 일행이 짐을 꾸리고 아침을 먹기 위해 알베르게 식당에 내려왔을 때, 우리보다 부지런한 순례자들이 이미 식당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알베르게의 시설은 천차만별인데, 이곳은 주인장이 여자로 전반적인 시설과 운영이 깔끔했다. 아침을 신청한 순례자들은 숙박료에 €3을 추가하면 빵과 과일, 우유, 커피를 양껏 먹을 수 있다.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한 순례길을 걸을 때 아침을 든든히 먹고 걸을 것을 권하고 싶다.


오늘은 순례길 중 산세가 준험하기로 소문난 피레네 산맥을 넘어 론세스바야스(Roncevaux) 까지 가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피레네 산맥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에 위치하고 길이 약 430km, 최고봉의 높이가 3,404m에 달하는 산맥으로 우리는 오늘 해발 1400m 지점을 통과해야 한다. 마침, 알베르게에서 €10의 돈키 서비스(다음 목적지까지 배낭을 배달)가 있어 나는 간략한 짐만 챙기고 10kg에 준하는 배낭은 알베르게에 맡겼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 일행도 조금 늦은 출발을 했다.

순례길의 첫날, 안개가 자욱하다.

휘는 대체로 말수가 적은 편으로 묵묵히 혼자 걸어나가는 편이고 베드로는 내게 스틱의 올바른 사용법을 알려주며 특유의 친화력을 보였다. 예상과 달리 베드로는 군인이 아니라 영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었다. 아일랜드에서 일 년을 산 나와 베드로는 제임스 조이스나 오스카 와일드와 같은 아일랜드 출신 작가와 문학 이야기로 비슷한 취향을 드러내며 금세 말문이 트였다. 그즈음, 오늘 일정의 유일한 쉼터이자 바르(BAR)가 있는 오리 송(Orisson)에 도착했는데 어제 휘와 베드로가 산 복숭아와 오렌지로 당과 수분을 보충하고, 바르(BAR)에서 점심으로 먹을 보카 디오(bocadillo)를 포장하고 진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커피 향이 비의 운치를 더했다.

휴식을 충분히 취한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우리 앞에는 피레네 산맥의 오르막길의 연속이었고 작은 배낭을 메고 있었지만 나는 점차 숨이 차기 시작했다. 만약 배낭을 돈키 서비스에 맡기지 않았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순례길에서 자신의 배낭은 자신이 짊어지고 가야 할 인생의 무게라는 말이 있다.


인생의 무게가 꽤 무거워 보이는 휘의 안색이 좋지 않다. 나와 베드로는 고된 산행을 수다로 풀어내고 있었다. 베드로가 말하길 " 오늘, 날씨가 정말 도와주는 거예요. 만약, 날씨가 화창했으면 이 높은 피레네 산맥의 형상에 지레 겁먹었을지 몰라요. 게다가 날씨가 흐려서 그나마 덜 더운 거예요."라고.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안개가 자욱해서 한 치 앞이 안 보였기 때문에 우리는 피레네 산맥을 넘으면서도 높은 산의 형상을 볼 수 없었고, 덕분에 어떠한 좌절 없이 눈앞에 보이는 곳으로 그저 한발 한발 내디디며 걸을 수 있었다.

흐린 날씨에 이어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 잔디밭에 둘러앉아, 포장한 보카 디오를 한 입씩 베어 물었다. 안개 비에 젖은 빵으로 잠시 요기를 하고 다시 걷기 시작하는데, 우리 앞에 한국인 여자가 비가 오는데 모자도 쓰지 않은 채 걷고 있었다. 베드로는 잠시 망설이다가 여분의 모자를 내어주며, "이거라도 쓰고 걸으세요." 한다.

순례길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열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우선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눈이 마주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부엔 까미노(Buen Camino)를 외친다. 우리 앞에 브리티시 남자 둘 여자 하나가 비가 내려 미끄러운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남자 둘은 스틱을 하나씩 나눠 가졌고, 남자 하나가 여자의 미끄러지지 않도록 손을 잡아주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눈이 마주치자 부엔 까미노하고 외쳤다. 친구들을 리드하던 남자는 이 길이 좋아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산티아고의 길을 걸었다며 오래되어 흠집이 난 자신의 스틱을 올려다 보였다. 이번엔 여자 친구와 자신의 친구를 데리고 왔다고 말하며 브리티시 특유의 멋이 묻어나는 웃음을 지었다. 길을 걸으며 좋은 이유가 여럿 있지만, 서로 웃으며 주고받는 '부엔 까미노(Buen Camino), 좋은 길 되세요!'라는 이 말이 나는 미치도록 좋았다.

이제, 우리는 이 길을 왜 걷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2008년부터 산티아고의 길을 걷고 싶었다. 모든 일은 아주 작은 계기에서 시작된다. 우연히 접한 산티아고 순례길의 인터넷 기사. 사랑한 사람과 헤어진 후 상심이 큰 나머지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 그리고 일기 속에 적은 한 줄의 문장이 내 소설의 모태가 되는 등. 내 몸속에서 이 작은 계기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다 이제야 화학반응을 일으켜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을지 모른다. 오랫동안 내 소설 속에 살던 그녀와 그를 만나야 할 시간, 내가 이 길을 걸으며 보고 느끼게 될 장면을 소설 속에 생생하게 쓰고 싶은 열망이었다.

베드로는 "저는 가톨릭 신자인데, 가톨릭 신자에게 산티아고 순례길은 성지순례길 중에서도 꼭 한번 가보고 싶어 하는 소망이에요."라고. 베드로와 내가 감성적 성향과 일명 아재 개그를 구사하는 부류라면 휘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고로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부류였다. 휘는 아마 묵묵히 길을 걸으며 왜 이 길을 걸으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찾으려는지 모르겠다.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드디어 30.8km 의 일정을 마치고 론세스바야스(Roncevaux)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샤워를 하고 입었던 옷들의 세탁을 마치고 산티아고의 길에서 저녁 미사를 드렸다. 베드로의 말에 의하면 미사는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라는 의미에서 미사를 받거나 미사를 한다가 아닌 '미사를 드린다'라고 한단다. 미사 중간에 서로의 평화를 비는 시간에 옆 사람과 포옹을 하며 '당신의 평화를 빕니다.'라고 말한다. 길 위에서의 미사는 내게 여러모로 처음이라는 것에 대한 의미로 충분했다.

저녁은 순례자의 메뉴를 먹었다. 순례길을 걸으며 좋았던 점 중의 하나 바로 이 메뉴다. 레스토랑에서 Menu del Perigrino, 순례자의 메뉴를 택하면 Main dish로 돼지고기, 소고기, 치킨, 생선 중 택 1. 샐러드처럼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스타터를 택 1, 와인이나 맥주 혹은 다른 음료 택 1 그리고 후식이나 커피나 포함되는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지만 이 3 course 요리를 10유로에 먹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순례자의 메뉴다.

길 위에서 저마다의 이유로 걷는 이들을 만난다.

걷는 이유는  모두 제각각이지만

우린 지금 같은 길 위에서 외친다.


부엔 까미노 (Buen Camino)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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