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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작 Mulgogi Jul 05. 2017

일실다득(一失多得) 하나를 잃더라도 다른 것들을 얻다

CAMINO DE SANTIAGO / D-1

Paris- Biarritz - Bayonne -  Saint-Jean-Pied-de-Port

2016.07.04


몇 해 전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혼자 걷던 미국인 여성이 살해된 후 토막 난 채 발견되는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혼자 걷는 한국인 순례자가 강도를 만나 겨우 목숨을 건진 일도 있다. 이러한 연유로 특히 여성의 경우 혼자 걷더라도 앞뒤로 순례자의 무리가 시야에서 보일 정도의 간격은 유지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나 역시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면서 산티아고 순례길 온라인 카페에서 이러한 소식을 접한 후, 그토록 가고 싶던 길이지만 한편으론 오금이 굳기도 했다. 다행히 나는 온라인 카페에서 시작일이 같은 사람이 있었는데, 내가 파리에 머무는 동안 그 역시 파리에 머문다기에 걷기 전에 미리 만나자고 제안하였다. 여행에서 명심할 점은 낯선 곳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호의적인 마음으로 다가는 것도 좋지만, 호의를 베풀었다가 오히려 도둑으로 몰리거나 마약 밀수 공범으로 오인받는 일도 허다하기에 사람에 대한 경계를 놓지 않아야 했다.


비가 후드득 쏟아지는 파리의 오후. 노트르담 성당 앞에서 휘를 처음 만났다. 체격이 우람한 휘는 다행히 나쁜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비가 와서 얼큰한 국물이 먹고 싶던 나는 휘에게 쌀국수를 먹자고 했는데, 사람 좋은 웃음으로 휘는 흔쾌히 그러자고 하여 우리는 파리에서 베트남 쌀국수 집이 밀집해있는 거리로 향했다. 


쌀국수를 먹으며 이 사람이면 같이 걸어도 나쁜 사람은 아니겠거니 안념하였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휘도 나에 대해 이 사람이면 나쁘거나 이상한 사람은 아니겠거니 여겼다고 한다. 쌀국수를 후루룩 먹고 우리는 이틀 후에 스페인과 프랑스 국경 마을 생장피드포르(Saint-Jean-Pied-de-Port)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노트르담 대성당 [Cathedral of Notre-Dame de Paris]

이틀 후. 나는 모든 파리 여행을 마치고 Camino de Santiago 의 시작점인 생장피드포르(Saint-Jean-Pied-de-Port)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옆자리에는 예닐곱 살로 보이는 프랑스 꼬마 아가씨와 아빠가 나란히 앉았다. 꼬마 아가씨의 장래희망은 모델이나 메이컵 아티스트가 되어 보였다. 비아리츠로 향하는 내내 핸드폰을 동영상 모드로 기내 테이블에 세우더니,  '여러분, 이건 새로 나온 제품이에요. 손등에 이렇게 짠 다음 얼굴에 고루 펴 발라주세요.'와 같은 프랑스 말을 쏟아부으며 흡사 홈쇼핑을 방불케 하는 손놀림으로 선크림을 자신의 얼굴에 찍어 바르는 것이다. 잠시 후, 이 열정적인 꼬마 아가씨는 나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찡긋 웃어 보인다. 동영상을 촬영 후 꼼꼼히 모니터링하는 모습이 어찌나 맹랑한지 한참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자니 어느덧 비아리츠에 도착했다.


착륙 후 비행기 사다리 차가 준비되지 않았는지 기내 방송이 흘러나왔고, 승객들은 비행기에서 내리지 못한 채 웅성웅성 거리기 시작했다. 비아리츠에서 생장으로 가려면 바욘으로 십 오분 가량 기차를 타고, 다시 바욘에서 생장으로 가는 기차를 환승하여 한 시간 정도 달려야 한다. 기차 시간을 체크하니 다행히 생장으로 가는 기차 시간은 여유가 있다. 삼십 분 정도 지났을까. 드디어 비행기에서 내리게 된 나는 공항에서 비아리츠 기차역까지는 십 분이면 충분했기에 마음을 푹 놓았고, 그제야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기차역 근처 카페에서 맥주 한 잔에 비상식량으로 챙겨 온 김과 초콜릿으로 요기를 하고,  기차 시간에 맞춰 플랫폼으로 갔다. 그런데 이승환의 '왜 슬픈 예감은 늘 틀린 적이 없지'라는 노랫말처럼  이미 도착해야 할 기차는 영 오지 않고, 불안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비아리츠 역 [GARE DE BIARRITZ]

비아리츠 역에서 바욘으로 가는 기차가 십 오분 연착되는 바람에 바욘에서 생장으로 가는 기차를 눈 앞에서 놓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프랑스 대중교통 시스템이 악명 높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실체를 경험한 나는 숨이 탁 막혔고 오늘 생장에 도착해야 하는 이유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오늘 안에 생장에 도착해야 순례자 사무실에서 순례자 등록과 함께 첫 일정을 동행하기로 한 휘와 만날 수 있다. 휘는 테제베(tgv)를 타고 생장에 일찌감치 도착해서 또 다른 한국인 베드로를 만나 서로 정보를 공유하며 마트에서 필요한 물품을 산다는 연락이 왔다. 아니나 다를까 내일 첫 일정이 전체 산티아고 여정 중에서도 가장 조험한 코스로 중간에 쉴 곳도 마뜩지 않아 당과 수분을 보충할 과일과 산행에 필요한 스틱은 필수라고 했다. 필요하다면 내 것도 대신 사놓겠노라며 돈은 생장에 도착하면 달라고 했다. 그뿐 아니라 오늘 묵을 알베르게 예약도 대신 해주었다. 


만에 하나라도 내가 오늘 생장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휘를 다시 만날 일은 희박할 것이고 알베르게 숙소 예약과 스틱 비용을 전해줄 수도 없으니 초면에 대단한 폐를 끼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한 번이라도 얼굴을 본 한국인과 같이 걷는다는 안도감이 있었는데, 처음부터 혼자 걸을 생각을 하니 눈 앞이 막막하다.


오늘 꼭 생장에 도착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기차는 바욘에 도착했다. 혹시 생장 행 기차도 연착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기차가 도착하기 무섭게 환승 플랫폼으로 내달렸지만, 눈 앞에서 생장행 마지막 기차를 놓치고 말았다. 허무하게 기차를 바라보다 눈이 마주친 역무원 아저씨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영어를 잘 못하는 역무원은 한숨을 쉬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한다. 


혹시라도  내일 탈 수 있는 기차 티켓만 변경해주면 어쩌나 하는 심정으로 재차 "오늘? 갈 수 있느냐"라고 물었더니 "Oui, oui [위위] 오늘"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휴우.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역무원 아저씨를 따라 역 사무실로 갔다. 아저씨는 한참 동안 여기저기 전화를 하더니 해결됐다는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택시 타고 가라고 한다. 택시 비가 얼마냐고 했더니 프랑스 열차가 연착되는 바람에 내가 기차를 놓친 것이니 비용은 프랑스 정부에서 부담한단다. "네가 티켓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라면서 또 한 번 웃어 보인다.


아저씨 이름은 질 다레. 꼬불 머리가 멋진 중년의 프랑스 신사, 하지만 순박한 미소를 가진 아저씨가 부른 택시가 도착했다. 지금은 택시를 타고 생장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한 차례 극변을 겪은 후 택시 안에서 창 밖으로 펼쳐지는 비아리츠의 아름다운 석양을 보고 있자니, 이제야 마음이 평온해진다. 택시 아저씨는 내가 한국에서 왔다니까 "삼성, 꼬레아" 라면서 반가워한다. 흰 바탕에 빨간 체크 남방. 화가 모자를 눌러쓴 택시 아저씨를 보니 프랑스가 달리 낭만과 예술의 나라가 아니구나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바욘에서 생장까지는 택시로도 한 시간 거리. 아저씨는 틈틈이 내게 프랑스 말로 관광 안내를 해주고, 한국인인데 핸드폰이 삼성이 아닌 아이폰이냐고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우여곡절 끝에 늦은 밤 드디어 생장에 도착했다. 기진맥진한 나와는 달리 장난기 그득한 택시 아저씨는 나보고 택시에서 내린라고 한다. 그리곤 나의 핸드폰을 뺏어 들고는 생장피드포르(Saint-Jean-Pied-de-Port) 표지판 앞에 나를 세우고 브이를 하라고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공식 시작 지점인 곳에서 기념 촬영을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생장피드포르 [Saint-Jean-Pied-de-Port]
생장피드포르 [Saint-Jean-Pied-de-Port]

바욘 역의 질 다레 아저씨도 택시 아저씨도 모두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순수함과 호의로 이국인을 대하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오늘, 내게 너무 큰 행운이었던 두 아저씨들. 정말, 감사합니다.


택시 아저씨와 작별 인사를 하고 순례자 사무실을 찾아가는 길에 또 다른 한국인 F를 만났다. 그는 이미 순례자 등록을 마치고 알베르게를 찾는 중에 내가 한국인임을 알고 기꺼이 순례자 사무실까지 안내해주었다. 타국에서 만나는 한국인이 이렇듯 반가울 수 없다.

순례자 사무실 [Pilgrim's reception office]

순례자 사무실에 도착해 기본적인 인적사항을 기재하고 순례자 등록을 마쳤다. F는 순례자 사무실 한편을 가리키며 기부를 하고 순례길을 걸었던 성인 야고보의 상징인 가리비를 살 수 있다고 일러주었다.

순례자 사무실 [Pilgrim's reception office]
순례자 사무실 [Pilgrim's reception office]

일득일실 (一得一失)이라고 했던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을 것이요. 하나를 잃으면 또 하나를 얻을 것이다. 늘 내가 베푼 것보다 타인의 도움을 받을 때가 많은 점에서 일득일실(一得一失)이 아닌 나는 오늘 일실다득 (一失多得)을 톡톡히 깨달은 하루였다. 하나를 잃더라도, 다른 소중한 것들을 얻을 것이었다.


바욘 역무원 질레 아저씨, 택시 아저씨, 그리고 F 덕분에 무사히 생장에 도착하여 일행인 휘와 또 다른 일행 베드로를 만날 수 있었다. 첫날부터 순탄치 않았지만 곳곳에 숨은 행운과 감사가 바로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오늘 무사히 생장에 도착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 이제, 정말. 여행의 시작이다.


Buen Ca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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