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망각

기억한다는 것은 바로 산다는 것이다.

by 드작 Mulgogi

내 기억력이 남들에 비해 유난히 좋았던 이유


나의 최초의 기억은 세 살 혹은 네 살 무렵. 엄마가 무릎에 나를 눕혀 머리를 감겨주던 장면이다. 샴푸가 눈에 들어가 떼를 쓰며 울었는데, 엄마한테 엄살을 피운다며 된통 혼나기만 했다. ㅡ예나 지금이나 우리 엄마는 자식들을 좀 강하게 키우는 구석이 있다.ㅡ 서러움에 울음이 멈추고도 딸꾹질이 멈추지 않은 채 점심으로 라면을 먹었다. 어릴 적 몇 안 되는 엄마와의 추억이기에 이마저 행복한 기억이다. 또 다른 기억은 외할머니의 배 밭에서 토끼털 조끼를 입고 엄마와 할머니를 향해 넘어질 듯 말 듯 뒤뚱거리며 달린 잔상이다. 이외에도 남들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다섯 살에서 일곱 살의 일이 내게는 영화의 장면처럼 남아있다. 내 유년시절은 늘 기억하기 위해 애쓰며 살았고, 어느 정도 자아를 인식할 즈음부터는 날짜(년/월/일)를 기억하며 그 날의 함께 한 사람과 있었던 일, 그 사람이 입었던 옷까지. 본격적으로 무언가를 기억하는 버릇을 갖게 되었다.


내 기억에 관한 버릇은 유추컨대 이런 게 아닐까. 내가 세 살 때 엄마와 아빠는 이혼을 하셨다. 이혼 후 어린 내가 눈에 아른거려 엄마는 다시 아빠와 재결합하려 했지만, 내가 다섯 살 되던 해에 두 분은 완연한 이혼을 맺었다고. 이후 나는 아빠의 섬세하지 않은 보살핌을 받다가 경주 산골의 큰집과 울산의 외할머니의 집을 오가며 여러 사람 손에 양육되었다.


알을 깨고 태어난 새끼가 최초로 본 생물체를 어미로 여기고 강한 애착을 느끼는 것과 흡사하다. 나는 엄마와 같은 애정의 대상을 여럿 거치면서. 내게 애정을 쏟은 대상들이 하나 둘 정을 붙일만하면 사라져 가는 걸 수도 없이 봐야만 했다. 어릴 적 나의 방어적 기제는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이후, 내 기억력은 유난히 좋았던 거 같다. 필사적으로 기억해야만 했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사라져 간 엄마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 엄마와의 몇 되지 않는 추억을 손에 꼭 붙들고 있어야 했다. 그래야만 엄마를 다시 만나도 엄마를 알아볼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래서 그럴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것 중의 하나가 마음에서 가장 가까웠던 사람과 이별하는 일이다. 아마 내게는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을 일일지 모르겠다.



망각의 의자가 필요해


내 기억력이 유난히 좋았던 이유에 대해 자각해 보다가 알게 된 책.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에서는 세계 최초로 과잉 기억 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은 질 프라이스(미국)의 14세 이후 일어난 모든 일상을 거의 완벽하게 기억하는 그녀의 축복과 고통의 시간을 이야기하고 있다. 좋은 기억이라면 그녀의 증상은 축복이겠으나 사람이 살면서 항상 좋은 기억만 가질 수는 없지 않은가.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듯,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뎌지고 지워져야 할 기억까지 생생하게 기억된다면, 그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녀처럼 과거의 기억이 통제되지 않고, 강물이 범람하듯 매일 기억이 범람하여 나의 현재를 침범한다면, 현재를 살면서도 과거의 늪에 빠져 허우적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럴 땐 앉으면 잊고 싶은 기억을 지워주는 망각의 의자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잊고 싶은 기억은 지워주고,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좋은 기억은 영원히 보관해주는 기억 보관함 같은 것이라도 있다면 어떨까.



기억한다는 것은 바로 산다는 것이다.


난분분한 기억의 연상 작용이 지나간 밤. 2014년에서 2008년으로 이어지는 기억은 너무 선연하여, 그림을 그린 후 채색까지 하고 싶게 만든다. 채색하면 유의 무방한 미소, 내 기억 속 그대로 살아나 웃어줄까. 반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 반은 특유의 진지한 표정을 번갈아 짓는 네가 여전히 선연하게 그려진다는 것이 내겐 불행일까, 축복일까. 실은 아까까지만 해도 제발 그만 나타나, 하고는 "네 인생 잘 살아가면 되지. 왜 자꾸 나타나서 괴롭히는 건데?" 드라마 <연애의 발견, 2014년> 극 중 여주인공의 대사가 떠오를 지경이었는데. 다행이다.


신학자 마르틴 부버가 '기억한다는 것은 바로 산다는 것이다.( To remember is to live )' 라고 말했다. 그만 기억한다는 것은 그만 살아가는 게 아닐까. 모두 다 없어진 일이 되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면, 그건 너무도 공허할 것이다. 기억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해도 이대로 가끔 웃어주면 고마운 거다. 그리고 유년시절부터 유달리 내 기억력이 좋았던 이유, 그건 내가 살아가기 위함이었겠구나 싶다.


바람이 불고, 또 하루가 지나간다.

살아가기 위한 기억을 끌어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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