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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 Joy Jul 10. 2020

알을 깨고 나와 공허 한가운데서

종교 밖에서 01_ 퇴로는 없다

  껍질 속의 세월을 모두 부정할 수는 없다. 견고하게 영원할 줄 알았던 나의 세계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마침내 와르르 무너졌을 때, 살아온 세월을 모두 부정당하는 듯했다. 방향과 기준을 잃었고, 목적지를 잃었다. 겨우 일어나 일상을 유지했지만, 모든 것에 의욕을 잃었다. 쉬고 싶었고 생각하기 싫었다. SNS, 책 읽기, 음악 듣기, 글쓰기, 좋아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그 일들은 한동안 '좋아하는 일'이 아니었다. 하기 싫었으니까. 그렇게 무력하게 몇 개월을 흘려보냈다. 문득, 폐허처럼 보이는 이곳이 새로운 세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구나. 언제까지고 사라진 것들을 한탄하며 머물러 있을 수는 없겠구나. 방향은 모르지만 가 보아야겠구나, 내가 가는 그곳으로 길이 생기겠구나.

    길을 만들며 걸어보자. 그렇게 가는 일이 두렵기도 고단하기도 하겠지만 그 위에서 누군가를, 무언가를 만날 수도 있겠지.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데미안 - 헤르만 헤세>


    중학생 때였다. 의미를 다 알 수 없었지만,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문장들에 홀려 데미안을 읽었던 것이.

처음 '신은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을 때, 새로운 세계에 대한 경외와 기대보다는 세상 밖으로 내던져졌다는 두려움이 훨씬 컸다. 데미안에서 몇 번이고 외며 곱씹던 구절을 떠올렸다. 알을 깨고 나온 세계는 혼란이었다. 계절에 따라 꽃이 피고 지고 녹음이 짙었다 단풍이 들어 땅으로 스몄다 아린을 벗고 다시 싹을 틔우는 화원에 살다 모래바람뿐인 사막에 동 떨어진 화초가 된 기분이었다. 무너진 나의 일부는 혼란 속에 흩어져 사라져 버렸고, 먼지처럼 흩날리는 나를 얼마큼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몰랐다. 애초에 잡을 수 있는 형태의 것이었는지도 몰랐다. 무너진 세계의 잔해 속에서 껍질을 깨고 나온 것은 축복인지 저주인지 몰랐고, 저주 쪽에 모든 감각은 쏠려 있었다. 폐허 위에 허망히 서 있는 내 모습이 자주 그려졌다.

    30년이  넘는 세월을 "보수주의" 진영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왔다. 지금에 와서는 그 "보수"라는 부분을 "무지"라는 말로 바꿔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이 되긴 하지만 많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는 그렇다. 흔히 말하는 [모태신앙]은 아니지만 [거의 모태신앙]에다가 부모님은 내가 세상에 태어난 지 몇 년이 되지 않은 시점부터 급격하게 모든 가치와 기준을 기독교에 두고 변화해 가셨고, 어릴 때부터 그분들의 변화를 목격하며 의심의 틈 없이 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 의심이 생겨날 때마다 믿음이 부족하고 불손한 자신을 탓할 때가 많았다. 애초에 의심이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모든 의심은 "완전하고 아름다운 신" 그 실존(한다는 믿음)의 기반에서 생겨났고 어떤 답을 찾든 기반을 흔들만한 것은 아니었다.

 

   태어날 준비가 되지 않은 새는 가만히 있다. 안전한 알 속에서 가만히 있다. 아직 알인 채로 때를 기다린다. 투쟁의 때, 투쟁하여 껍질을 깨어날 수 있는 때.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린다. 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상태로 존재한다. 실제 하는 분명한 성장이 있지만 누구의 감각에도 들키지 않는다. 그러다 어느 날 "빠지직" 불현듯 원래의 세상을 뚫고 나온다.


폐허 위에서

    인생의 첫 4년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종교를 벗어나 있다. 완전히 벗어났다고 하기엔 애매한 부분이 남아 있긴 하지만 심정적으로는 거의 탈종교의 상태가 되었다. 애매한 부분은 가령 이런 것들이다. 아이들이 신이나 성경에 대해 질문을 할 때 반사적으로 이전과 같은 대답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하지만 점점 대답하기보단 다시 질문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넌 어떤 것 같아?

    질문 앞에서 아이들은 지금의 나보다 훨씬 신앙적인 답을 스스로 찾아간다. 이미 아이들 안에도 딱딱한 틀이 생긴 듯하다. 매주 주일마다 몇 가정이 모여 "예배"라고 불리는 모임을 한다. 그 모임을 위해 특히, 아이들 예배를 위해 꽤 많은 준비와 노력을 쏟고, 아이들과 예배드릴 때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는 듯 행동한다. 아주 가끔이지만, 신을 부른다. 생각한다.

    그럼에도 종교를 벗어났다고밖에 할 수 없는 명징한 표들이 있다. 더는 기도하지 않는다. 종교의 경전을 읽고 그 안에서 신의 뜻을 찾으려 고뇌하지 않는다. 인생의 작은 선택들 앞에서조차 성경과 기도, 두 가지 척도를 가지고 답을 찾으려 애써왔다. 아직 그런 방법론이 무용하다 단정 짓지는 못하겠으나 만약 신이 있다면 그래서 우리에게 성경과 기도라는 것을 허락했다면, 나의 사용법은 틀리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무한히 펼쳐진 - 앞으로가 아닌 옆으로 - 인생들에 답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


혼돈과 공허

    태초가 있기 전 세상은 그렇게 표현되던데... 차근차근 정리되어 쌓여 있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태초 이전의 지점으로 강제 이주한 것이다. 그런 채로 살아갈 수 있다면 차라리 편했을까. 하지만 그럴 수 없었고 기존의 형식은 버렸지만, 기독교라는 지표 위에 여전히 발을 딛고 서 있었다. 기로에서 모든 가능성이 열린 상태지만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상태에서 선택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로 여겨진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시간을 보내고 있다.  


    왜 이렇게까지 급격한 변화가 일순 찾아왔을까. 의아한 마음에 돌이켜 보니 확신이 오류였다. 신과 인간 그리고 자연, 그 사이에 무수한 질문들을 품고서도 한 번도 "신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던 것.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한 고민은 사라진 듯했으나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었다. 터트려 줄 무언가, 언젠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무엇을 믿고 있는 거지?' 하고 의심의 물꼬가 트이는 순간, 쓰나미처럼 몰려와 나름 정리되어 있었던 사유의 기반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았다.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닐 일일 텐데 한 부분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아무렇지 않게 잘 지내다가 한 번씩 외부 충격이 올 때면 전혀 회복되지 않은 사람처럼 여지없이 허물어진다. 왜 이렇게 잘 부서지는 것으로 만들어졌을까. 나의 근원에 대해 의문하지 않을 수 없는 날들이다.


신앙과 신념

    트리거는 현상이었다. 교회의 분열. 그 참혹한 현장을 직접 목격한 것은 처음이었다. 목회자이신 부모님은 10여 년 전 10년간 목양하시던 교회에서 나오셨다. 주관적 시점으로 장황하게 설명할 생각은 없으므로 간략히 말하자면 목사와 장로 간의 갈등이었고, 그 과정에서 편이 나뉘고 성도들은 갈팡질팡했다. 다행일지 그 속에 나는 없었다. 성인이었고 결혼을 통해 부모님과의 관계에 "독립 공간"이 생긴 개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부모님이 겪으시는 고통에 마음이 아팠고, 그 속에 속한 사람들의 선택이 성경의 가르침과 너무 큰 거리가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목회자인 부모님만이라도 예수가 가리키고 있는 방향으로 선택하길 바랐지만, 강요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 후 다시 10년의 세월이 지나가면서 부모님은 그 시간 속에서 섭리하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더 성숙한 신앙인으로 갈 수 있었던 큰 변환점이었다고, 이곳(현재 목회지)에서의 사역을 어쩌면 예비해 두셨던 게 아니었을까, 라며 정리하셨다. 그 일은 그렇게 넘어갔다. 기사에서 접하는 교회분열에 대한 소식은 쉽게 넘어가 졌다. 일부 왜곡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그리고 성직자란 이름을 팔아먹고 사는 장사꾼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일이 내 눈앞에서 일어났다. 처음엔 당혹감이 너무 커서 멍했다. 곧 정신을 차리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보았다. 섣불리 할 순 없어서 신중에 신중을 기해 호소도 해보고 이 사람 저 사람과 모여 회의도 하고 참여해 달라는 모든 모임에도 참여했다. 대화가 시작되고 갈라선 지점에 평화의 기운이 깃들길 바랐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떠나 모두의 선택은 사랑이 아닌 증오와 분노였고, 본인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자기를 내어 주었다는 그분을 조금도 닮지 못하여 그저 자신만 위하는 이기심이었다.


결국, 나도.
십자가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 보려
전에 없이 애를 썼는데
끝내 사랑할 수 없었고
그래서 포기했고
차라리 마음껏 미워하는 편이 솔직한 것 아닐까 생각했다.


    하나님, 하고 불렀다. 아버지, 하고도 불렀다.

    일여 년간 부러 하지 않은 일이다. 기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기도하겠다는 말을 쉬이 뱉지 않았다. 그냥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가만히 생각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했을 뿐이다. 타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때로는 거의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친구를 만나고 와 절감했다. 친구는 행복하게 살고 있었지만,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었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그만인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정신없는 우리 집 삼 형제를 대하는 친구 부부의 눈길에서 사랑이 뚝뚝 흘렀다. 친구 가정에 아이는 간절해 보였는데, 의학적인 소견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았다. 전혀 그런 기색을 주지 않았는데, 괜히 혼자 마음이 쓰였다. 기도할 수 있었다면 그리 안절부절못하지 않았을 텐데... 내 맘 편하자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신을 향해 기도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도 몇 번, 기도할 수 없는 이 지점에 있는 게 막막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코로나 19 바이러스와의 전쟁, 그 안에서 스러져 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불합리한 세계 속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 쳤고, 결국엔 죽어간 사람들, 전혀 모른 척하고 살 수도 있는 일들, 하지만 자꾸만 시선이 가는, 마음에 맺히는 소식들. 그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적었다. 솔직히 마음을 다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다고 할 수도 없었다. 이 마음의 부담을 자꾸만 기도라는 것, 신의 능력에 기대어 덜고 싶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길이 없다. 이미 이전의 세계는 소멸했다.  


앞으로 가기 위해, 쓰는 일밖에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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