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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 Joy Aug 03. 2020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알람 소리가 한참 울리는데도 오래 귓속으로 들어와 정신을 깨우지 못한다. 소리가 들리고 뇌에 가 닿은 신호가 몸에 영향을 주기까지 다시 한참의 시간이 필요하다. 큰아들의 방학이 시작되어 조금의 늦잠을 허용한다. 마지노선까지 가서야 겨우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면 그때부터 전투 돌입이다. 아이들을 깨우고 급하게 부엌으로 내려가 아이들의 간단한 요기를 차리고 아침 도시락(Brotzeit box)을 싼다. 잠결인 아이들에게 소리를 질러 채근하며 도시락 싸기를 마치면 뛰어 올라가 미적미적하는 아이들의 준비를 도와주면서 나도 초고속으로 나갈 준비를 한다. 아이들을 유치원으로 데려다주고 오면 남아 있는 가족들의 아침 식사를 차린다. 각자의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아들과 남편을 불러 서로 바쁜 식사를 마치고 나면 이런저런 집안일이 줄줄이 열을 맞춰 있다. 아니,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있지만, 기어이 줄을 세운다. 우선순위에 밀리는 일들을 나중으로 미뤄야 조금이나마 Anne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내 이름은 물론 Anne이 아니다. ‘기쁨의 하얀 길’이랄지 ‘반짝이는 호수’ 같은 이름을 붙여 놓고 세상 모든 것과 수다를 떠는 <그린 게이블즈의 앤>은 어린 시절 작가의 꿈을 심어준 소중한 친구였다. 그 친구의 이름을 빌려 오래 다가가지 못했던 꿈에 다가갈 결심을, 실천을 이제야 해 보는 것이다.

 

코로나 시대를 살며 가족들과 부대끼는 시간이 훨씬 길어졌다. 남편은 첫 봉쇄 이후로 쭉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큰아들은 6월 중순부터 격주로 학교에 가기 시작했지만 금방 다시 여름 방학이 되었다. 그나마 둘째가 Vorschulkind(예비 초등학교-Grundschule- 학생)라 5월 말부터 등원을 시작했고, 형 덕분에 막내도 함께 유치원 갈 수 있는 자격을 받았다. 꼬맹이들이 유치원에 가 준 덕분에 일상이 훨씬 가벼워지긴 했지만 온종일 혼자 있는 시간이 전무함은 역시나 타격이 있었다. 막내도 클 만큼 컸는데 다시 24시간 근무라니!

코로나 봉쇄가 시작되고 얼마지 않아 좌골신경통이라는 병을 얻어 한동안 절룩거리는 긴 밤을 보내야 했다. 병까지 얻을 정도로 몸엔 무리가 갔지만 나쁘기만 한 시간은 아니었다. 사랑하는 이들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어 좋았고, 다섯의 조화를 극대화해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절박해진 현실은 꿈으로 등 떠밀어 주었다.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가족들과 분리되어 쪼갠 시간에 나와 꿈을 다시 발굴하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언제나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대학 전공을 다르게 선택했고, 따라 다른 직업을 가졌고, 출산으로 그나마 남아 있던 꿈의 흔적마저 희미해졌다. 내가 아닌 엄마로만 긴 시간을 살았다. 그 일만 감당하기에도 하루하루가 전쟁 같아 살아남기에 급급했다. 덩그러니 서 흘러간 시간을 바라보니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가 흐렸다. 있는 듯했으나 없었고, 없었지만 결국 있었던 나날들.

 

나를 전부 쏟아부어 만나고 깊어진, 아이들. 너희들의 그림자가 아닌 한 사람의 실체가 되어 나란히 옆에서 걷고 싶어. 이제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출렁이는 바나나들




독일, 한국, 그리고 세계 곳곳에 있는 엄마들과 재미있는 작업을 함께 하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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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 @myfreshbanana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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