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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 Joy Jun 26. 2020

아무것도 하지 않기

절망의 망령이 내 안을 어지럽힐 때

지난 며칠간 아이들이 없는 오전(드디어 세 명 모두 등원, 등교를 한다!), 급히 집안일을 마무리해 놓고 하릴없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나오지 않는 글을 쓰느라 문장을 쥐어짜 내는 일은 고역이었다. 당위성의 압박에 자주 노출되는 편이다.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으면 결국 하는 것 없이 고통만 받게 된다. 그동안 꾸역꾸역 써낸 문장 중 몇이나 남겨둘 수 있을까? 안 쓴 건 아닌데 쓰지도 않은 상태에 봉착했다.


‘기왕 되지도 않을 거 다른 쪽으로 신경을 돌리자’ 싶었다. 한참 몸을 굴렸다. 양손 무겁게 장을 봐 왔고, 미루고 미루던 입지 않는 옷 정리를 대대적으로 감행했고,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박스를 정리하고, 남편이 부탁한 우편물을 송부하고 왔다. 짧은 독일어와 친절한 점원의 미소가 기운을 북돋워 줬다. 한참 몸을 쓰고 나니 정신은 말갛게 깨어나는 것 같은데 피로가 급물살을 타고 덮쳐왔다. 얼마 전에 배우 유아인이 운동하는 짧은 영상을 봤다. 가만히 누워 있으면 트레이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가 계속 몸의 긴장 상태를 체크하며 이완을 유도한다. 운동하는 사람은 몸의 모든 부분을 가장 편안한 상태로 만드는 것만 한다. 그러다가 잠이 들어버렸다. 아, 지금이다! 저 운동이 필요한 때! 잠옷으로 갈아입고 안경도 벗고 꽉 조여 맨 머리도 풀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빛을 차단하고 가만히 누웠다. 몇 분. 헉헉 내몰던 숨이 차차 고요해지자 뇌가 요동치며 깨어났다.



긴장의 아이콘, 허둥지둥의 대명사!


조그만 스트레스 상황이 와도 정신이 혼미해지고 시간의 압박에 쉽게 평정을 잃는다. 쓰는 일이 순조롭지 않았던 지난 며칠간 잠도 깊이 못 잤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몸이 부대껴 쉬면서도 시간을 허투루 쓸 수 없다는 생각에 듣거나 읽었고, 잠을 잘 때도 무언가를 하다 기절하는 식이었다. 남편이 몇 번인가 불을 꺼 준 것 같았다. 방의 불이 꺼져도 뇌의 불은 끄지 못했고, 그래 봐야 생산성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아침에 알람 소리도 듣지 못하고 겨우 일어나 보면 정말 딱 물에 젖은 솜이불 꼴이었다. 손가락도 들기 힘들 정도로 무겁고 눅눅한 몸을 겨우 일으켜 하루를 시작하면 본격의 긴장이 다시 시작된다.



계속해서 [쓴다는 것에 관해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말 쓰고 싶은 이야기들은 잔뜩 벌여놨는데 생각과 문장은 벼려지지 않았다. 쓰려하면 할수록 거대한 늪에 빠져 점점 헤어 나올 수 없는 기분이 든다.  중구난방으로 생각은 날아다니는데, 손에 잡히지는 않고, 무엇보다 큰 문제는 ‘정말 너무 모른다’는 자각이었다. 무엇을 하나 쓰려면 그것에 대해 알아 가는데 글을 쓰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어느 것에도 천착하지 못하고 왜 이리 기웃거리며 살았나, 살아온 날들에 대한 회한까지 든다. 이미 밟고 온 길을 되돌아가 쓰는 것도 익숙한데 분명치 않은 것 투성이라 새로이 배우고 정리해야 했다.

실패의 리스트는 써도 써도 줄어들지 않을 만큼 길지만 한 번도 벼랑 끝 심정으로 다 쏟아본 적이 없었다는데 더해,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장악하면서 스텝이 꼬이기 시작했다. 처음 마음의 첫 단어는 ‘즐겁게'였다. 나약한 인간류인 내가 즐겁지 않은 상태에서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까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계속 쓰기 위해서 즐거움은 필수요소였다. ‘기왕 시작한 거 잘 해내야 해!’ 하고 다짐하는 순간, 즐거움의 요소는 모조리 소실되었다. 책을 읽는 일, 문장을 떠올리는 일,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세상 곳곳을 기웃거리는 일, 음악을 듣고, 팟 캐스트를 듣는 일, 모든 것에 당위가 스며들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 주어진 집안일과 여타 잡다한 일들이 거추장스럽게만 느껴졌다.


주차금지, 쉬지 말고 달리라고, 누가 그랬지?

성공이라는 허깨비는 잠들어 있는 절망의 망령을 깨웠다. 절망감은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잠식해 동력은 일순 차단된다. 그리곤 곧장 포기의 첩경을 달음질하는 것이다.


절박함이 일상의 밖으로 한 발짝 밀어냈을 때, 바깥의 공기가 상쾌하고도 달콤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충만해졌다. 이번에는 다를 거라는 희망이 차올랐다. 겨우 졸업 기준을 넘긴 토익점수, 기어이 메우지 않은 학점들, 계약직으로 슬쩍 끼어 들어간 꿈의 직장, 시의적절했던 등용의 문을 닫아버린 게으름, 투쟁을 빌미로 접어든 백수 생활, 시작하고 끝내지 못한 학위, 완성하지 못한 제안서, 작은 벽 앞에서 놓아버린 직장, 늘 곤란을 당하면서도 늘지 않는 외국의 생활어, 부딪히지 않고 쉬이 돌아갔던 우회로들.

투지가 불타오르는 스타일이 아니라, 말 그대로 설렁설렁 살았다. 그런대로 즐거웠고, 노력에 비해 많은 것을 누렸다. 운이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10년, 아니 지나온 세월 내내를 후회했고, 그만큼 사무치게 간절했다. 즐거움이란 건 눈속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즐겁지 않아도, 고통스러워도 이번만큼은 끝까지 밀고 나간다는 의지가 깊은 곳에서는 활활 타고 있는데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평온한 척한 것이다. 뻔한 속임수를 내세운 이유는 그래 봤자 내가 변한 건 아니라서 불이 모두 태우게 내버려 둘 수 없어서였다. 타오르다가 결국엔 타 죽을 운명인 걸 예감했고, 열정을 잠재워야 자분자분 내딛을 수 있었는지도 몰랐다.

오전 내내 노동의 폭풍 속으로 몸을 내던지고는 피로를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극단의 상태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란 극적인 효과가 난다는 걸 알았다. 곧 다시, 실패의 기운이 스멀스멀 몰려오고 절망의 망령들은 포기의 길로 내밀려고 할 것이다. 그때는 ‘절대 포기하지 않아!’ 의지를 다지기보단, 길 위에 선 나를 내려다보아야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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