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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 Joy Jun 20. 2020

벽 오빠

내 머릿속의 성평등_01

할머니는 사촌 언니들은 예뻐하셨지만, 나만큼은 아니었고, 셋째 큰어머니는 싫어하셨다. 내리 딸만 셋을 낳았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할머니는 내게 천사 같은 분이셨다. 늘 나를 무릎에 앉히고선 "내 강새이, 아이고 이쁜 내 강새이." 하셨다. 나랑 동갑이었던 셋째 큰아버지의 셋째 딸인 사촌 언니는 이유도 모른 채 할머니의 애정에서 제외됐다. 나이가 들면서 할머니께 살갑게 대하고 챙기는 사람은 언제나 그 언니였다. 외동딸로 사랑에 부족함 없이 자란 나는 애교 같은 것이 없는 편이었다. 할머니를 좋아했지만, 표현은 서툴렀고, 주변을 살피는 성숙함은 언니를 따라갈 수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성 관념, 성 역할, 성 불평등 같은 것은 적어도 나한테는 없는 것이었다. 딸이어서 받는 설움 같은 것은 드라마나 이야기 속에나 나오는 건 줄 알았다.


처음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했던 것은 대학 졸업반 때였다. 졸업반이 많이 듣는 수업에서 전공으로 갈 수 있는 다양한 길에 대한 긴 강의를 듣고 질문하는 시간이었다.  


교수님,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결혼과 출산을 넣으면 인생 계획이 너무 꼬여요.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제한적인 것 아닐까요?


연세 지긋한 남자 교수님께 뾰족한 대안을 기대하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너무 진부한 대답에 맥이 탁, 빠졌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 또한 굉장히 숭고한 일이죠. 그것도 멋진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수님은 왜 지금까지 우리가 갈 미래의 길에 대해 뭐 이렇게 장황한 강의를 하신 건가? "그런 멋진 삶, 교수님은 안 사셨죠. 교수까지 되셨잖아요. 그 밑바탕에 아내의 숭고한 희생이 깔린 건가요? 숭고한 거 교수님이나 하세요." 그때는 그저 허무함에 생각이 멎어 아무 대꾸도 못 했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게 말이냐, 빵구냐' 기막혀하며 백 마디의 대꾸를 날렸을 텐데 싶다.


직장으로 나오자 구조가 가지고 있는 기울기가 확실히 눈에 들어왔다. 신입사원의 비율은 비슷했지만, 직급이 높아질수록 여자들은 하나둘 나가떨어졌다. 여자 부장은 단 한 명, 네 명의 이사와 총장은 모두 남자, 총장을 보좌하는 보좌관까지 남자였다. (10년 만에 옛 직장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그 간 세상이 조금은 바뀌어 이사장도 여자고, 이사진 중에도 여자가 한 명 있다. 주요 사업에도 성 평등 분야가 들어가 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겠지만, 분명히 우리는 나아가고 있다) 유능하고 성격까지 좋은 직원이었는데 육아휴직이라도 하고 돌아오면 진급과 주요 업무에서 제외되었다. 남자 동료들이 앞으로 치고 나갈 때 자녀와 경력의 갈림길에서 머뭇거리던 선배들은 머뭇거린 시간의 두, 세 배의 불이익을 당했다. 직장으로 돌아와 모든 것을 감내하고 다시 달려갈라치면 수많은 목소리 사이에서 괴로워야 했다.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에 대한, 집안일을 꾸려 가는 방식에 대한, 여자의 역할, 여자가 감당해야 할 것들, 여자, 여자, 여자로 시작하는 너무 많이 들어 체화되어 버린 타인의 목소리, 사회의 목소리.


그러다 그 일이 터졌다. 직장 내 성추행 사건. 상사인 남자가 여자를 비어 있는 회의실로 데려가 대화하다 강제로 입을 맞췄다고 했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사건의 경위가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결국 남자인 상사는 징계를 받고 여자인 직원은 퇴사를 선택해야 했다. 가해자는 좀 부끄러웠겠지만 -실제로 부끄러워했는지조차 모르겠다- 그게 다였고, 피해자는 직장을 잃었다. 성범죄는 항상 피해자가 더 큰 벌을 받는 식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나의 착각인가? 그 일을 계기로 친한 여자 동료들은 서로 자기가 겪은 일에 대해 털어놨다. ** 부장님은 어린 여직원들을 모아 술자리를 가지자고 한다. 안 나가면 불쾌해하고 나가면 자꾸 선을 넘는다. 그 사람이 건드릴 때 소름이 끼쳐 정색해도 자꾸 그런다. 나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라더라. 서로의 경험을 털어놨지만, 정작 그 사건에 대해서는 모두 침묵으로 대응했다. 사건에 연루된 사람만 가해자이고 피해자가 아니란 걸 알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불평등의 구조에 대해 말할 때 항상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고 붙였다. '나 그렇게 센 여자 아니에요' 하고 면죄부를 받고 싶었다기보다는 페미니즘이 뭔지 정말 너무 몰라서였다. 나 페미니스트요, 하고 선언하기엔 민망함이 앞섰다. 행동하지 않는 사상가는 허상이다. 눈으로 지켜보고 머릿속에서 생각만 했기에 실제로 페미니스트는 아니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새로운 터전에서 새로운 관계를 쌓아가는 시절이었다. 직장과 교회가 주요 무대였는데, 같은 교회에 다니는 오빠가 어느 날 대놓고 "넌 벽이 있는 것 같아." 하고 말했다. 누군가를 대할 때 선을 긋고 벽을 세우고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충격을 받았다. 그날 이후 몇 개월에 걸쳐 친한 친구들한테 질문을 돌렸다. 나에게 있는 벽에 대해서. 문자로도 하고 직접 만나서 얘기하다 생각이 나면 하기도 했다. 친구들은 펄쩍 뛰면서 무슨 소리냐고 했다.


너한테 벽이 어디 있어? 그 사람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역성을 들며 편을 들어주어 당시엔 그걸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 친구들 사이에서 [벽 오빠] 이슈가 한동안 지속됐다. 친구들에게 반복해서 확인을 받은 것은 찜찜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절대 못 느끼는 그 벽이라는 게 나한테 정말 있었다. 부드럽게 말해보면 관계의 경계가 분명한 편이다. 모든 이에게 상냥하게 대하지만 친절로 선을 그어버리는 식이었다.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던 부분이었는데, 언어화되어 귀에 박히는 순간 모든 경험의 퍼즐이 맞춰지면서 자각했다. 나에게는 벽이 있다. 그 벽이 지인 대상 성범죄에서 어느 정도 방어벽이 된 것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러니 여성들이여, 이제 대인관계에 좀 미숙해지길 바란다. 그것이 자기 자신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이다."라고 설파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어떨까? 그러니 이제, "짧은 치마 입지 마세요, 가슴은 꽁꽁 숨기고 다니세요, 남자들에게 흘리고 다니지 마세요(흘린 거 아니고 그냥 웃은 거거든요)." 하면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치환시키려는 개소리는 집어치우시기 바란다.

어쨌든 그 벽은, 당시 나를 어느 정도 보호해 줬던 것 같다. 지인 대상 성범죄에 관해서 만큼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여자든 남자든 직장 상사에게 서먹하게 대하는 게 자랑스러운 일도 아닌데, 미숙함이 나를 지켰다고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온다. 그나마도 불특정인을 대상으로 하는 성범죄 앞에서는 무용지물인 것을.

  


남자들 앞에서, 때로는 여자들 앞에서조차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때 종종 분위기가 싸해진다. 때로는 언어의 전투가 급작스레 시작되기도 한다. "여성주의"라는 말 앞에 많은 남자가 방어태세를 갖춘다.

불평등은 곳곳에 존재해. 젠더 간 불평등보다 훨씬 심각한 것들도 많지.
그리고 지금은 여자들이 손해 보는 것도 없잖아?

단순히 일상의 이슈로 국한하면 그래 보일 수도 있다. 개인의 선택과 문제로 몰고 가기 십상이다. 더욱이 당사자가 아닌 입장에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에 대해 공감해 주길 기대하는 건 오산이겠지. 그대는 내가 아니니까. 인간의 공감 능력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편이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일에 대해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거의 결여되어 있다. 몇몇 특별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을 제외하곤 최우선은 자신, 다음 가족, 그리고 다양한 연으로 맺어진 지인, 그렇게 겹쳐진 원의 끝부분과 나의 거리를 재고 팔을 안으로 굽히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오면서 사회가 그나마 진보할 수 있었던 것은 본능을 거스르며 굽힌 팔을 펴고 폈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다른 쪽에 있는 사람을 설득하는 데만 있지 않다. 지난 몇 년간 연대에 대해 깊은 회의감에 빠졌다. 연대는 가능한가? 근본적인 의문이 생겼다. 같은 의견을 가져도 개인의 경험과 성향 내지는 성격, 관계망과 지식 배경, 다양한 이유로 하나의 의견은 수백수천 개로 갈라진다. 피를 토하며 앞에서 싸우는 사람이 있는데, 저렇게까지는 좀 심하지 않나 하며 뒤에서 팔짱을 끼며 점잖은 체하는 사람이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후자다. 이 자리를 빌어 앞에서 싸우시는 분들께 사과를 전한다. 연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차이를 좁혀가고 결국 되지 않는 선은 포용하는 수밖에 없다. 같은 편끼리 달라 튕겨져 나가더라도 그래서 포용은 할 수 없더라도 서로 적이 되지는 말아야 한다. 그렇게 갈라진 의견은 부딪히고 깎여 발전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해 '그래도 너는 내 옆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기어이 흘러가는 변화의 물결에 벽을 쌓아 막는 일을 줄일 수 있다.

여자의 일생, 중학생 때 읽은 책 중 가장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많은 이들이 기울어지고 어그러진 구조를 바로 세우고자 끝없이 투쟁했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위험과 불이익을 감수하고 나섰기에 변화는 가능했다. 성평등의 이슈는 방대하고 다양한 층위의 생각이 존재해 하나의 글이 담을 수 있는 것은 아주 적다. 지난 10년 방구석에서 페미니즘을 혼자 공부했지만 내 안에 갇힌 생각이라 조심스럽기도 하다. 어렵게 뜨거운 감자인 페미니즘 이슈를 꺼낸 이유는 함께 생각하고 고민하고 살펴보고 옆에 있어 주길 당부하고 싶어서이다. 인간인 우리 모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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