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ne Joy Jun 16. 2020

밤을 지새우다

창작의 고통에 관하여

매일 쓰자고 다짐하고 얼마 간은 결심만으로 많은 것이 충족되었다. 드디어 시작한 거야, 평생 하고 싶었던 것을 향해 한 발짝 내디딘 거야, 결핍보다는 행위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곧 현실을 보는 눈이 열리고, 매일 쓴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절감했다. 통상 일과를 마치고 막내를 재우고 나면 나의 글쓰기는 시작되는데, 그 시각이 오후 9시 반에서 10시 사이다. 남은 일이 있어도 그 시간은 고수하고자 집안일에서 손을 떼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더 늦어지기도 하고 짧은 메모로 그날의 글쓰기를 갈음하는 경우도 있다. 막내를 재우다 뻗어버려 12시고 1시, 2시고 깨어나면 그때 컴퓨터 앞에 앉는 날도 있다. 그때부터 맹렬하게 써 내려가면 참 좋을 텐데,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글은 샘물처럼 퐁퐁 솟아나지 않는다. 나의 글은 자라난다.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볕을 쬐고 정성을 쏟고 기다려야 한다.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것들이 쌓이고 쌓였다 발효되어 잔뜩 부풀어 오르면 그제야 글이라는 형태로 탈바꿈한다. 그렇지 않고 쓴 글은 어색하거나 부끄럽다.


시작한 글이 아주 많다. 쓰고 싶은 것들이 많다. 그런데 쓴 그리고 쓸 글이 누구에게 닿을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하면 막막하다. 시작했을 때와 이어 쓸 때의 온도 차가 완연하여 애초에 어떻게 쓰려했던 것인지 가물가물할 때도 있다.

그리하여 밤이든 새벽이든 글을 쓰려고 앉아있을 때면 망연히 우주에 떠 있는 기분이다. 다음 단어를 기다리는 커서는 깜빡거리며 재촉하지만, 중력이 없는 곳에 붕 떠서는 무엇도 할 수가 없다. 먼저 발을 땅에 딛기 위해 음악을 켜고 자료조사(라고 쓰고 딴짓이라 부릅니다)를 하고 그래도 안 되면, 보다 멈춘 드라마를 이어 본다. 어떤 날은 시작했던 글을 몇 개나 열어 놓고 여기서 한 문장, 저기서 한 문장 꾸역꾸역 쓰기도 한다. 그러다 한 네 시간쯤 지나면 손가락에 속도가 붙어 타자 치는 소리가 경쾌한데 그때부터는 배경음악도 자료조사도 없이 꽤 오래 쓸 수가 있다. 어느 정도 쓰다가 시간이 너무 늦어 '이러다 내일 못살지' 싶어 누웠다가도 한 번 각성한 감각은 다시 컴퓨터 앞으로 나를 끌어 앉힌다. 깊은 밤,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이 깨어나는 시간이 되면 자려고 눈을 감고 누워도 머릿속에서까지 글이 막 써진다. 그러면 기어이 일어나 기록을 해야 한다. 평소에 잘 써지지 않으니 그런 순간을 놓치기 너무 아깝다. 그런 날은 한 숨도 못 자고 밤을 꼬박 넘긴다. 그렇게 아침까지 깨어 있는 날엔 글을 완성할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나의 글쓰기는 숱한 기록에 기반했다. 하루키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메모하지 않는다고 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한번 머릿속에 들어가면 그리 쉽게는 잊히지 않는 법입니다


"뇌 내 캐비닛에 보관해둔 온갖 정리 안 된 디테일을 필요에 따라 소설 속에 그대로 조립해 넣으면, 거기에 나타난 스토리는 나 자신도 놀랄 만큼 내추럴하고 생생하게 살아납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 무라카미 하루키 中>


부러운 양반 같으니라고! 

전공을 하지 않은 데다 한 번도 작가들의 세계에 발끝도 들여놓아 본 적 없는 사람이니 작법 책을 읽어볼 만도 한데, 최근 들어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고, <드라마 아카데미 - 사단법인 한국방송작가협회 편>이라는 책을 한 권 사보긴 했지만, 원체 글이라는 것은 배우기보다는 체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강한 편이라 그나마도 완독 하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처음 가보는 길에 표지판 같은 것은 필요해서 작가들의 자전적 수기를 몇 권 읽었다. 그중 방금 언급한 하루키의 증언을 읽으며, 그냥 작가들이 써 주는 좋은 작품들을 탐독하며 생을 마무리하는 편이 낫지 않겠나 포기하는 심정이 되기도 했다. 시작이 너무 달랐다. 하루키가 가진 집요함, 근면, 결단, 타고난 능력 위에 겹겹 쌓아 올린 시간을 감히 흉내 낼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것이 지구력이라고 칠 때 그나마 실낱 같은 희망을 보았다.

(좌) 나의 글쓰기 교과서들 (우) 둘째가 정성들여 키운 파가 꽃을 피웠다. 나의 글도 언젠간!

하루에도 몇 개인지 알 수도 없는 글이 수없이 올라오는 브런치를 둘러보며 그들이 아우성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거기에 하나를 더 얹는 게 맞는 길인지 머뭇거린다. 그러다 곧 이렇게 쓰는 사람이 넘쳐난다면 누가 끝까지 쓰느냐의 싸움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여기까지 이끌어 준 것은 한 번도 타올랐던 적 없는 열망, 다만 놓지 않는 뜨뜻미지근한 집념, 포장해 말해 지구력 비슷한 거였기 때문이다. 은근하게 계속되는 열망 그 한 올 실마리를 붙들고 끝까지 가보자. 가늘고 길게 길게.  


처음 본격적으로 쓰고자 했을 때 다짐한 세 가지가 있다.

매일 쓸 것

흐름을 놓치지 말 것

비교하지 말고 나의 길을 갈 것

세 가지 다 쉽지가 않다. 매일 쓰는 일은 일상과 병행하기에 꽤 버거운 과업이고, 흐름을 놓치지 않는 것 역시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비교하지 말기, 는 필수 항목인데 이미 대한민국에서 혹은 전 세계에서 인정받은 작가들의 책을 읽다 보면 자극이 되고 나의 글쓰기에 분명 긍정적인 요소들이 많을 테지만 끝에 가선 자기 비하와 연민 사이를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다독하지 못한 것, 세상과 인간에 대해 너무 무지한 것, 세심하게 바라보고 감각하지 못하는 것, 또 감각한 것들을 세밀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것, 핍절한 어휘, 궁색한 문장, 상상력의 부재, 식상하고 고정된 시각.


새롭지도, 따뜻하지도 않고, 그나마 재미있지도 않은 그렇고 그런 이야기.  


잘 쓴다는 것에 대해 끝없이 몸부림치며 고뇌한다. 정답은 없다. 다만 언제는 김연수 작가가, "쓰기는 본능 같은 것이다. 그 본능이 이끄는 사람들은 기필코 쓰게 되어 있다."라고 한 말에 위로받고, 또 하루는 앞에 간 늦깎이 작가들 - 미우라 아야코랄지 조앤 롤링 같은 - 의 일화에 힘을 받으며 무겁게 걸음을 뗀다. 나름 뼛속까지 내려가 써 내려간 글이 누군가의 마음에는 가 닿았으면 좋겠다. 많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혹여 단, 한 사람에게라도 가 닿을 수 있다면...




매거진의 이전글 벽 오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