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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e Joy May 21. 2020

4월

4월은 어디서나 아름다운 달이다.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여름이지만 꽃샘추위의 심술을 지나 만개한 꽃들 사이로 여름 가는 길목을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작년 이맘 때는 여행을 갔다. 고난 주간이었다. 보통 주일을 끼고 여행을 가지 않으려 하는 편이지만 이제 더 이상 가야 할 교회가 없었다. 종려 주일을 마지막으로 다니던 교회를 나오기로 했다. 당장 부활절을 보낼 교회를 찾는 것도 여행의 목적 중 하나였다. 목적지는 부다페스트. 그 도시가 아름답다는 말은 여러 사람에게서 반복해서 들었다. 한인들도 꽤 많이 살고 있는지, 큰 도시라서 그런지 한인교회도 몇 개 있었다. 몇 개월간 원치 않는 분쟁에 휘말려 여러모로 지쳐 있던 진국과 나에게 필요한 시간이었다. 그 어느 여행보다 공을 들여 모든 것을 누리고 싶었다. 이제 와서는 아무 책임감도 느끼지 않는 일들 때문에 소진한 몸과 마음을 회복하고, 그 일의 결과로 온 상실과 공허를 메우고 싶었다. 어느 정도는 여행의 덕을 봤고, 그럼에도 모든 것이 이전으로 돌아올 수는 없었고, 뜻하지 않게 발견한 남편과 나 사이의 간격을 재차 확인했다. 봄의 기운으로도 생명력 같은 것은 채워지지 않았고 그럼에도 살아내야 하는 날들이 원망스러운 힘겨운, 또 상관없이 아름다운 나날들이었다. 그곳을 다녀온 얼마 후 우리가 탔던 것과 같은 종류의 유람선 한 척이 도나우 강에 가라앉았다. 여행 일정을 조금만 달리 했다면 우리 가족이 탔을지도 모를 배였는데, 탑승자 서른다섯 명 중에 일곱 명의 구조자를 제외하고 모두 생명을 잃었다.

밤의 부다페스트 그리고 검은 물



그 해 4월도 그렇게 버거운 나날들이었다. 

둘째가 태어난 지 100일이 되지 않아 그 애를 품에 안은 채로 흩날리는 벚꽃의 아름다움을 채 바라볼 새도 없이 허덕이며 보냈다. 첫 아이 때보다 훨씬 능숙하게 많은 것에 대처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날이 갈수록 무게가 늘어가는 아이를 24시간 안고 들고, 긴장한 채로 작은 것에도 반응해야 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남편은 회사에 큰 아이는 어린이집에 간 시간 무력하고 우울한 시간 티브이를 켜 놓고 버텼다.


채널을 돌리다 평소에 잘 멈추지 않는 뉴스 채널에 멈췄다. 현실감 없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 500여 명 가까운 사람을 태운 대형 페리가 가라앉고 있었다. 처음엔 슬픈 소설이나 영화를 읽는 사람처럼 가상의 이야기에 감정을 이입한 것 같은 심정이었고, 그런 식의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고 현실감이 스며올수록 그저 흘러내리던 눈물은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것으로 변해갔다. 배가 점점 가라앉을수록 대한민국 전역은 더 깊은 슬픔에 잠겼다. 신을 믿든 그렇지 않든 조금이라도 이 일에 마음을 둔 사람들은 기적을 구했다. 그 주 주일 참담한 마음으로 참석했던 예배에서 입교송이었던 “주의 나라가 임할 때”라는 찬양을 하는데, “놀라운 사랑의 기적의 하나님”이라는 가사를 목구멍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목사님이 예배 인도 중에도 설교 중에도 계속 기도하자고, 함께 기적을 구하자고 하였기에 그때마다 기적, 기적, 하고 마음으로 되뇌었지만 슬픔과 고통을 어찌하지는 못했다.  


사실 기적까지도 필요 없는 일이었는데, 제대로 된 사실은 가려지고 정부 주도의 구조는 뭉그적 대기만 하고 민간인들이 목숨을 걸고 하는 구조에 방해만 되었다. 오랜 시간의 구조작업이 계속되었고, 사람들이 팽목항으로 달려가고 머물러 어찌해 봐도, 뱃속에 갇혀있는 사람들의 가족들이 울부짖고 토로해도 결국 속수무책으로 배와 함께 너무 많은 사람들을 그냥 바닷속으로 보냈다. 사고가 난 지점부터 의문 투성이었지만 그 어느 것도 속 시원히 밝혀지지 않았고, 배를 인양하는 일도 3년이나 지나 정권이 바뀌고서야 겨우 되었다. 개인에게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도 세월호는 커다란 상처로 남았고 작은 일에도 쉽게 흔들리는 내게는 너무나 큰 자국을 남겼다. 그렇다 해도 멀리 떨어진 나 같은 사람 따위와는 비교도 안될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여전히. 아직도.



이번 주는 미디어나 음식을 끊는 일을 하지 않기로 했다.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나에게 그러한 경건 활동은 사실상 무의미한 것이다. 다만 슬픔에 잠기기로 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그 날을 기억하고, 또 함께 기억하자고 외치기로 했다. 6년 전 허망하게 가라앉은 304인을 위해 그때 할켜진 모든 이들을 위해. 아무렇지 않게 오늘도 살아남은 나의 생을 부끄러워하며.. 신에게서 돌아서려는 지금에서야 경건의 모양보다 능력에 조금 더 신경 쓰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이 슬픔은 신의 영역이 아니다. 

오롯이 인간에게 속한 슬픔이다.

그날, 신은 304인을 그리고 기적을 바랐던 수천만의 사람을 유기했다고 생각한다.

그때부터였나 보다. 더 이상 신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게 된 것은.


그러고도 기댈 곳, 완전이나 전능 같은 말로 수식되는 그가 필요했기에 꾸역꾸역 믿음에 매달렸다. 믿지 않으면서도 몇 번 더 기적을 간구했고, 어떤 때는 그런 기도가 통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그 날의 참담함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많은 시간 없었던 일처럼 잊고 살았지만 마음 깊은 곳에 침몰한 배는 여전히 있었고 늘 그곳에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갓난아이를 안고 방 안에서, 따뜻하게 볕이 드는 곳에서 티브이를 들여다보며 신에게만 빌었던 내가 원망스럽다.

이제와 생각해 봐도, 그때의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지만, 적어도 신에게 빌지는 않을 것이다. 서서히 가라앉는 배를 보며 그 절망을 그대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여전히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 방구석 워리어일 뿐이다. 하지만 끝까지 싸울 것이다. 무의미가 의미가 될 때까지. 그 배는 우리 눈 앞에서 그렇게 가라앉아버렸지만,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 있는 이상 진실은 침몰하지 않으리라.



신에게 기대지 않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아주 작은 것이라도 찾겠는 심정으로 시작했다. 304인의 이름을 하나하나 써 보기는 이번이 처음인데, 쓰는 것만으로도 분노에 가까운 슬픔이 몰려왔다. 당시에는 태어나지 않았거나 너무 아기여서 아무것도 모른 채 지나갔던 둘째와 셋째, 그리고 그 기억이 희미해진 첫째에게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름 쓰기에 동참시켰다. 세월호 기억 동화 “별이 된 아이들”을 보여주자 막내는 엉엉 통곡을 해 버렸다. 무엇이 막내를 슬프게 했는지 잘은 모르지만 그 작은 아이에게도 통곡할 일이었나 보다. 남편과 “그날, 바다”를 보는데 위에 두 녀석도 옆에 와 앉았다. 어려웠을 텐데 둘 째도 가만히 끝까지 다큐를 봤고, 첫 째는 끝부분에 가서는 울분을 토했다. 그때까지 싸워야 할 일로 남지 않아야겠지만 자신이 어른이 됐을 때도 의혹이 밝혀지지 않는다면, 자기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지겹다느니 이제 그만 할 때도 되었다느니 하는 소리를 해대는 무람없는 사람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고 해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있어주어 고맙고 같은 강도는 아닐지라도 같은 마음으로 그곳에 있고 싶다.


4월은 아름답고 슬픈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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