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덤의 조범팔, 그에 대하여
킹덤을 봤다. 워낙 명성이 자자한 드라마라 꼭 보고 싶었는데 공포, 스릴러물은 제일 중요한 장면에서 눈 감고 귀 막기 바쁜 나에게 거리가 좀 있었다. 친구는 보다 보면 적응이 된다고 격려해 줬지만 아무래도 혼자 보기엔 무리였다. 코로나 기간 남편과 함께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는데, 워낙 드라마에 취미가 없으신 분이지만, 세상의 모든 이야기에 매료되는 아내를 만나 드라마에 입문하였다. 허나 그의 관심을 끌 만한 드라마는 더욱이 한국 드라마는 매우 희귀해서 겨우 같이 볼 수 있었던 게 김은희 작가의 [시그널]이었고 다행히 그에 대한 평가가 좋아 [킹덤]을 같이 보게 만들 수 있었다.
초반에는 역시나 피 칠갑이 된 좀비들이 몰려다니는 장면과 음산한 음악이 흐르다 사람 놀라게 갑자기 왁왁 튀어나오는 좀비들 때문에 힘들었다. 하지만 서사의 흐름이 워낙 몰입감이 강해서 눈 감고 옆에 분한테 설명 들으며 무사히 정주행을 마칠 수 있었다. 이 진지하고 무거운 정치, 스릴러, 공포극에 유일하게 웃음을 주는 캐릭터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바로 조범팔!
삼십 대 초반까지만 해도 드라마에서 나의 관심을 끄는 인물은 여주, 남주, 기껏해야 서브 남주였다. 하지만 어른의 삶을 살면 살 수록 주변 인물들에게 더 관심이 갔고, 주인공의 이야기를 위한 인물이 아닌 각각의 인생 이야기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로 최근 가장 눈에 띈 작품은 [멜로가 체질]이다.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인물이 주인공이었고, 각 인물의 인생을 다 들어볼 수 있어 좋았다. 자기 인생의 주인공은 누구에게나 자기 자신이겠고, 시야를 넓혀 보면 주인공들이 사는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드라마, 영화의 서사에는 극을 끌고 나가는 주인공이 필요하고, 대부분 그들이 가장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꾸 눈길이 가는 인물은 모자라 보이는 조범팔이다. 그는 가장 큰 세력가인 혜원 조 씨의 일원이며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조학주의 하나뿐인 조카이다. 그 정도 위치이면 얼마든지 권력을 쥐고 뒤흔들만한데 전혀 관심이 없어 동래 부사도 삼촌에게 등 떠밀려 억지로 하게 된 걸 보면, 그냥 곱게 자라 조용하게 가진 것 누리며 살고 싶었던 인물로 보인다. 조 씨 일가인 만큼 조학주의 명을 따르고 중전인 사촌 동생의 부탁을 들어주며 자신도 모르게 악행에 가담하게 된다. 하지만 천성이 조학주 가족과는 판이해, 권력에도 관심 없고 마음이 약하고 기본적인 양심은 작동하는 사람이어서 그 양심의 밭에 결국 조학주 일가와는 다른 길을 갈 수 있는 무언가를 길러낸다.
그는 이 드라마에서 유일하게 연애 감정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가장 인간적인 인물의 표상으로 그를 내세웠기 때문인지 그는 인생사의 희로애락을 전부 보여주는 캐릭터이다. 자신을 구해준 용감한 여인에게 사랑을 느끼고 신분을 뛰어넘는 “검은 머리 파뿌리" 프러포즈를 시전 하는데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혹 알아듣기 싫었던 건가?) 전립선 질병(임병)을 진단해 주는 서비와의 호흡은 드라마에서 유일하게 웃을 수 있는 장면들을 연출한다.
초반에 그는 오직 두려움을 기반으로 선택한다. 그가 다른 선택을 하는 유일한 이유는 서비에 대한 마음이다. 그가 변화할 수 있게 하는 가장 큰 촉매제는 서비였고, 그녀에 대한 연심으로 다른 사람은 다 모르겠지만 그녀 한 사람은 돕고, 구하겠다는 심정으로 따라다니고 그녀의 말(그것이 비록 원망과 질책이라도)에 귀 기울인다. 꾸준히 세자 이창 일행을 배신하고 이기적인 선택으로 백성에게 해를 끼치면서도 자신을 돌아보고 후회를 반복한다. 시즌 2에서 역시 서비와 자신만을 위한 선택을 반복하지만, 선택의 결과와 그로 인한 주변인들에게 끼친 영향을 외면하지 않고 돌아보는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성장해 간다.
조학주가 중전에게 죽임을 당한 사실도 알지 못하고 쭉 그랬듯이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약한 마음 때문에 중전에 의해 어영 대장에 임명된다. 하지만 이창을 따르는 자들의 삼족을 멸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 사람들의 비명에 마음이 약해진 그는 차마 선고문을 다 읽지 못하고 중얼거린다.
나는 못 하겠다. 어영대장이고 나발이고 이런 건 못 하겠다.
그가 뒤로 나자빠져 있을 때 이창이 나타나 그에게 손 내민다. 잘하였다고, 이제 나를 따르겠냐고. 나약한 마음이 그가 옳은 선택을 하게 된 결정적 이유가 된 지점은 많은 사람에게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한다.
어리석고 나약하지만 그래도 성장할 수 있어. 옳은 길을 갈 수 있어.
변화하고 나서도 조범팔은 완전히 자신을 탈피한 새로운 인물이 아닌, 조금 나은 조범팔 정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궁중 안 좀비 전투에서 그는 다른 전사들과 함께 좀비에 맞서 싸우지만, 그의 전투는 아둔하고 여전히 두려움과 망설임 안에서 진행된다. 지붕 위에서 좀비들을 유인하기 위해 자신의 손을 베어 피를 떨어트려야 하는데 스스로 손을 베지 못해 망설이다 결국 함께 있던 영신에게 강제로 베이는 에피소드에서 그런 모습이 잘 그려진다. 그가 좀비를 죽이는 것은 살고자 하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에 가깝지 대의나 정의를 위한 숭고한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더 현실적이고 매력적이다. 결국 살아남아 좌의정까지 된 그를 보면서, 좌의정이 되어서도 여전히 수더분하게 술이나 즐기며 말동무를 찾는 평범함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약해서 백성을 위하지 못하고 권문세력 일가에 휘둘리며 아들과 자신도 지키지 못했던 아버지의 당부,
살아남아야 한다. 반드시 살아남아서 너는 저들과 다르다는 것을, 나와도 다르다는 것을, 진정한 왕이 무엇인지를 반드시 보여주거라!
만을 강박적으로 붙잡고 있던 세자는 백성들의 삶을 직접 보고 경험하면서 진정으로 백성을 위하는 지도자가 무엇인지 깨닫고 체득한다.
영신이라는 인물도 그렇다. 수망촌(한센병 환자촌) 출신인 그는 왜란 때 안현과 조학주가 수망촌 사람들을 좀비로 만들어 전쟁에 이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오로지 복수와 생존을 위한 인생을 살아간다. 굶주린 병자들에게 단이의 시체를 먹여 처음 지율헌에 역병이 발생하도록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탁월한 사격 실력과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생존력으로 세자와 함께 많은 사람을 구해내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자신이 보았던 양반과 다른 이창을 통해 단순한 생존을 넘어 다른 세상을 꿈꾸는 인물로 변화한다.
서비는 애초에 완성형 인물이다. 대범하고 목표 의식이 뚜렷하며 지혜롭고 따뜻하고 정의롭다. 상황의 작은 단서들을 통해 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인물이며, 그녀의 선택은 오직 이타적이고 의롭다. 그녀의 성장은 지적 성장이다. 처음 역병이 발병했을 때 스승의 기록을 보고 환자들을 다시 되돌리기 위해 지율헌에 감금하고 생사초를 찾아다닌다. 하지만 생사초를 발견하지도 못하고 결국 역병을 동래 전체로 퍼트리는 화근을 만든다. 시즌 2가 끝날 때 그녀는 생사초에 대해 많은 비밀을 풀고 기록하고 다음을 대비하기 위해 그것을 좌의정이 된 조범팔에게 전달하기까지 한다.
이 인물들은 너무 매력적이지만 지혜롭지도, 용감하지도, 능력이 출중하지도 않고 그저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아가고 싶은 보통 사람과 거리가 있다. 그래서 그들의 성장과 선함은 그저 이야기 속의 일이며 이야기 밖 현실에서 적용되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조범팔은 이야기 안과 밖을 연결하며 우리들의 성장을 다독여 주는 김은희 작가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