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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gissmeinnicht

할머니, 그리고 아직 잊히지 않은 사람들에게

by Anne Joy

살아나는 계절이다.


장을 보고, 식사를 차리고, 또 먹을 걸 정리하고, 아이의 숙제를 도와주고..

오랜만에 볕이 나는 마당에 화분들을 늘어놓았다.


죽어 나간 식물들은 지난겨울 황폐함의 증거물이었다. 하나였던 화분이 셋이 되고, 넷이 되고, 다섯이 되었던 여름, 그 풍성했던 여름은 두 계절만에 그만 폭삭 사그라들었다.

죽어버려 마당에 방치했던 화분 속 말라버린 잔해를 흙과 분리해 내고, 다음 부흥의 때를 위해 흙은 따로 모았다.

지난여름 부흥기의 흔적인 제멋대로 뻗어 나간, 따지 않은 포도가 가지만 말라 붙어 있는 포도나무의 가지를 치고, 잘라만 놓았던 들깨의 남은 줄기를 뿌리까지 뽑아내 밭(Hochbeet-농장물을 키우기 위해 높이를 둔 텃밭)을 정리했다. 나름 밭갈이라고.



할머니가 보고 싶다.

마당의 텃밭과 포도나무를 돌볼 때면, 언제나 할머니가 떠오른다.


할머니는 밭에 김을 맸다. 가지를 치고, 열매를 거두었다. 그것이 할머니의 일상이었다. 생계를 꾸리기 위해 지었던 복숭아, 포도, 대추 농사 외에도 가족들에게 먹이기 위한 것들을 -고추, 배추, 무, 참깨, 들깨, 옥수수, 고구마 내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 많은 종류의 식재료들- 키우고 거두셨다. 할머니는 평생 무언가를 길러 누군가를 먹여 살리는 일을 하셨던 것이다. 그런 할머니에게 더 이상 무엇을 기를 수 없는 때가 왔다. 평생 돌보고, 살리던 사람이, 더 이상 살리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무력해졌고, 그대로 점점 사그라드셨다.

할머니는 이 생명이 움트는 계절에 생명이라는 집합체에서 잘게 부서져 흩어졌다.

그 계절에 할머니의 죽음이 나를 살렸다, 생각하니 할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벌써 2년 전.


새로 시작한 독일어 과정에서 교재에 나온 문제도 제대로 풀지 못했다. 독일어 문장과 단어들 사이에서 언제나 길을 잃었다. 책 속에서, 앱 속에서 익힌 것들은 생활 속에서 흘러나오지 않았다. 나름 열심을 내었지만, 그 정도 열심은 부족했던 것일까.

독일 사람들 - 어느 나라에서 왔든, 이 땅에 살아가는 그들 - 을 만나면 웃으며 인사했다. 그리고 어색하게 지나쳐 갔다.

아이와 세상 사이에 다리가 되는 일은 때로, 꽃잎을 짓이겨 손톱에 물을 들이는 것과 같았다. 짓이겨지는 꽃잎은 나의 일부였다. 아이는 예쁘게 물들었을까. 봉숭아 물들이기는 매번 실패했었는데….


아무 생각 없이 집안을 치우고, 빨래를 돌리고 말리고 개고 넣고, 밥을 하고 먹고 치우고, 하다가도 한순간 주저앉았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는 동안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어졌다. 사라지지 않고 살아낼 수 있을까.


할머니가 보고 싶다.

할머니가 사라진 자리가 내게는 느껴지지 않는다. 삶에서 죽음으로 걷는 동안 할머니는 자신의 자리를 점점 줄여갔다. 생활을, 공간을, 기억을 줄여가셨다. 그리고 가족들 사이에서 존재를 조금씩 줄여가셨다. 그렇게 할머니는 살아 계시는 동안에도 조금씩 사라져 가고 계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해, 우리 가족은 한국을 방문했고, 요양원에 계시는 할머니를 찾아 뵐 수 있었다. 아직은 코로나의 기운이 완전히는 가시지 않았던 때라, 큰 유리 너머로 작고 작아진 할머니를 만났다. 자꾸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는데, 할머니는 유리벽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그 마지막 모습을,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같이 점심을 먹었어야 했는데…


그리고 이듬해 봄, 돋아나는 생명의 기운을 받지 못하고, 사그라들듯 위태롭던 나를, 할머니는 한국으로 불러냈다.

살아나라고. 살아가라고.



꽃집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집에 들를 때마다 먹을 것을 들고 왔던 친구의 손에 꽃 뭉치가 대신 들려 있었다. 어느 날은 일하는 꽃 집에서, 어느 날은 꽃가지를 꺾어다가, 어느 날은 지천에 널렸다며 길에서 뽑아다가.


그렇게 뽑아다 우리 집에 있는 병에 근사하게 꽂아 놓고는, ‘이게 물망초야. 근데 얘 독일 이름이 뭔지 알아?’ 했다.


Vergissmeinnicht!


나를 잊지 마세요,라는 뜻이야.


흐드러지게 피어났지만, 너무 작고 흔해 지나치기 쉬운 꽃의 이름으로 참 잘 어울린다고, 빛깔마저 튤립이나 장미처럼 쨍하지 않고, 은은한 것의 이름이 꼭 그래야만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전설을 전설대로 슬프고, 꽃은 꽃 대로 또 슬프구나. 슬픈 것은 아름답구나.


죽음은 잊히는 것일까.


그렇다면 할머니는 아직 죽지 않은 것일까.

기억하는 한, 죽음은 아직 다 오지는 못한 것일까.



다시 꽃을 피우지 못할 것 같아 보이던 수국에서 새순이 올라오고 있었다. 지난해 앞마당으로 옮겨 심었으나 꽃은 피우지 못했던 튤립 입들이 잔뜩 올라와 있었는데, 개중에는 꽃대가 올라오기 시작한 것도 있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 무스칼리는 벌써 꽃망울을 터트렸다.


살아나는 계절에, 살아나면서, 사라진 이들이 끝내 사라지지 않게 기억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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