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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끝, 겨울

by Anne Joy

여름은 길었는데, 짧았다.


6월인데 막 뜨거워졌다.

알프스마저 뻗쳐 나가는 기후 변화의 마수를 막아 주지 못했구나, 생각했다.

그러다 갑자기 여름의 기운이 뚝 끊겨 버렸다.

비가 왔고, 서늘해지기까지 했다.

여름이 오지 않으려나 싶을 때 즈음, 반짝, 하고, 날이 좋았다.

곧, 여느 해 그랬듯, 8월 중순이 지나자 기운이 꺾였고,

길어지려나 싶었던 여름은, 만개한 순간 흩어져 사라져 버리는 벚꽃처럼 짧았다.


계절은 짧아도 방학은 예정대로 길었다.

보통 긴 방학은 아이들 방학 프로그램, 방학 캠프, 그리고 긴 휴가로 채워져야 했지만,

대부분의 날들이 텅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더 길었다.

비어있는 날들에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해야 하는 것도 많았다.

많은 것을 했고, 또 많은 것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나날들이 뒤죽박죽인 듯, 어김없이 차례차례 흘러갔다.


얼마 전, 불과 얼마 전 문득 낙천적이란 단어가 나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낙천'이라는 단어에는 '긍정'이라는 단어에는 없는 본질적인 밝음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낭창하게 늘어진 동시에, 또 탄탄하게 조여진 그 단어를 마치 처음 발견한 양 신기하고 기뻐서 발을 동동 구를 지경이었다. 너무 좋아서 몇 번이나 소리를 내어 되뇌었다.

해가 고개를 돌린 지난 며칠간 내 안에 있던 긍정이건 낙천이건 간에 모조리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어제는 고단했다.

방학이 끝나지 않았으면 했는데, 또 빨리 끝나버렸음 싶었다.

집안일을 하려고 거실에 있는 동안 몰려드는 모든 소음이 신경을 날카롭게 했다.


오늘은 어둡고 눅진한 이 기운을 털어내 보려 둘째와 쇼핑센터로 향했다.

달달하고 차가운 커피 한 잔으로 몸을 짓누르는 피로를 걷어내고,

반짝반짝 근사하게 전시된, 그러나 사지 않을 물건들로 맘을 짓누르는 생활의 무게를 덜어내 보려 했다.


집에 돌아와선 밥을 해 먹고 또 치웠다.

오랜만에 찌뿌둥한 몸을 펴 운동을 했다.


오늘은 어제보단 나았다.


그래도 상담 예약을 해야겠다.


행복한데 불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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