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렇게 사촌이 되었다

무조건 서울집 가까운 곳

by 나비바늘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는 것을 알고부터 사람이나 다가올 일에 대해 기대를 접고 살았다.

좋은 일이 생기면 감사하고, 나쁜 일이 생겨도 뭐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장성 한 달 살기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편백나무 숲을 산책하고 인근 관광지나 돌며 좀 놀아보자는 심산이었다. 물론 전원주택에서 살아보기 체험도 깔려 있었다.


지금과는 다르게 많이 마르고 병약해 보였던지 선남 씨는 자주 나를 찾았고, 붙어 다니게 되었다.


정원 귀퉁이에 심어둔 페퍼민트를 따서 덖어 차를 만들고, 자외선에 등을 쪼여야 한다며 자신과 마찬가지로 등짝이 훤히 보이도록 티셔츠에 가위질을 하여 민망하게 만들기도 했다.


텃밭에 심어둔 취나물은 번질까 봐 윗대를 따는 법을 가르쳐주며 반찬을 해 먹으라 했다.

그리고 옆의 땅에 심고 싶은 작물을 사서 심어 보라니 우리는 덩달아 신이 났다.


그래서 5일 장날, 난생처음으로 상추, 케일, 고추, 오이, 호박 모종을 다. 시장에는 병아리도 나와 있고, 강아지도 새 주인을 찾느라 낑낑거리고 있었다. 감자도 사고, 언젠가 태어날 손주한테 줄 하양 고무신도 사고, 남편을 위해 장화도 한 켤레 샀다. 남편은 신어 보더니 좋아라 하면서도 얼마나 을 거라고 툴툴대기도 했다. 그냥 좋으면 좋은 거지 늘 이렇게 토를 단다.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세 평 남짓한 땅에 소꿉장난하듯 모종을 심고 물을 주었다.

아랫집 텃밭은 각종 키 큰 상추들이 상자틀에서 자라고 있어 부러웠다. 청치마, 적치마, 꽃상추, 로메인, 치커리, 겨자잎 등등


"훗날 내 집에도 저렇게 키워 봐야지."

보는 것마다 따라 하고 싶었다.


그리고 만난 지 3일 만에 선남 씨랑 고창 석정온천에 같이 가서 서로 등을 밀어주었다. 사람과의 친밀감은 기간을 능가하는 '마음 트기'였다.


저녁도 같이 사 먹고 돌아오면서 선남 씨가 기어이 한 마디 한다.

"혓바닥 아프게 이웃사촌 하지 말고 사촌 합시다!"

입 아프게 4음절로 발음하지 말고, 2음절로 하자는 뜻, 참 간단하게 관계를 정리했다.


그녀의 입담은 우리 부부를 늘 웃게 했다.

찰진 전라도 사투리에 싣는 유머 감각은 뛰어났다.


"저 고속도로는 장님도 운전할 수 있다요."

뭔 말인가 이유를 들어보면 눈 감고 운전해도 될 만큼 길이 반듯하다는 뜻이다.


자기 연락처에는 사람 이름 대신 자기만 아는 단어로 기입하는데 난처한 일을 겪었다고 했다. 추어탕을 만들기 위해 미꾸라지를 구입했던 사람의 이름을 대신해서 '미꾸라지'로 남겼는데, 그 주인이 본 모양이다. 킥킥 웃음이 났다.

나는 뭐라고 기입했을까?


어느 날은 슬리퍼를 끌고 내려 가, 축령산 입구의 식당에서 점심도 사 먹고, 돌아오는 길에는 편백나무로 도마를 깎아 파는 가게도 기웃거리며 봄꽃 만발한 이웃집들을 구경하며 올라오기도 했다.


또 동네의 예쁜 전원주택에 데리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인사도 시켜 주었다.

잘 지어진 집이 꽤 많았고, 집집마다 특색 있는 꽃들이 만발해 있었다. 내 집에 들이고 싶은 것들이 자꾸 추가되었다.


"그래 저거야. 꽃도 심어야겠어."


어떤 날은 초등학교 동창한테 전화를 하더니 유정란을 한 판 얻어 우리더러 먹으라고 했다.

먹거리가 자꾸 늘어났다. 머윗잎을 쌈 싸 먹고 계란은 프라이해서 먹고, 얼린 쑥도 갖다 주어 쑥국을 끓였다.


일주일이 후딱 지났고, 미국에서 선남 씨 남편이 귀국을 하여 이제는 넷이 어울려 다녔다. 조용한 성품을 지닌 선남 씨 남편은 말수는 적었지만 조곤조곤할 할 말은 다 했다. 늘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있었다.


"Enjoy!"


욕심 없이 즐긴다는 것이다.

먹지도 못할 텃밭의 먹거리를 두고 미국에 가면 생각나지 않느냐는 말에 대한 응답이었다.


가꾸는 자체가 즐겁기에 수확 여부는 상관없다는 무소유 개념이었다.

그때부터 우리 부부도 텃밭에 수확물이 많든 적든

"인조이!" 그 한마디를 따라 하며 웃었다.


시내로 외식 가던 날, 일하던 복장으로 나서는 자기 남편에게 선남 씨는 한 마디 했다.


"옷 좀 갈아입고 오쇼. 당신은 좋고 편할지 몰라도 같이 가는 나는 좀 부끄럽소잉."


그러면 그의 남편도 슬며시 웃으면서 "괜찮은데" 하면서 바꿔 입고 나오면 우리는 그 대화에 또 웃었다.

좀 깔끔해진 차림으로 오리고기를 사 먹고 오기도 했다. 심심할 틈이 없었다.


하루에 한 번씩 배낭에 간단한 간식과 음료수를 챙겨 축령산을 산책하기도 하고, 숲에 비치된 평상에 누워 있다가 내려오기도 했다.


산이 옆에 있다는 것은 건강해지는 비결이었다.

숲내음, 특히 편백나무의 상큼하고 맑은 냄새,

그러나 편백나무는 쉬이 냄새를 발산하지는 않았다. 코를 킁킁거리며 애써 맡으려 하면 느끼지 못하는데, 어느 순간 바람과 함께 스치고 지나가면 "아~~~" 그 향긋함은 아찔했다.


기대 이상의 열흘을 장성에서 지내다가 또 먼 거리를 달려 서울로 올라왔다.

우리의 전원주택 조건이 자꾸자꾸 늘어났다.


아무리 풍경이 아름다워도, 사람이 좋아도 서울집과 너무 멀어지면 운전 부담이 있구나.


"무조건 서울집과 가까운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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