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둔형 최작가 Jan 27. 2021

하게 된다면,

2021. 짧은생각#1.(210127) 

 오늘은 어제보다 느리게 시간이 흐른다. 몇 해 전에 상대성 이론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 당연하게도 이론에 중추였던 숫자들과 루트와 분수에 대해 기억나는 건 하나도 없을뿐더러 지금 다시 들춘다 해도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움직이는 물체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고 설명하는 교수의 확신에 가득한 말투와 그의 외투가 기억난다. 


 나의 손가락은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인다. 아마도 지금의 일을 평생 동안, 그래 봤자 60세가 조금 넘은 나이겠지만, 하게 된다면 분명히 나는 손가락 마디마디에 관절염을 얻을 것이 분명하다. 손가락이 바쁘다. 손목과 팔꿈치는 판판한 책상에 내리꽂았다. 자연스럽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서 허리가 굽는다. 60세가 넘으면 손가락의 관절염과 척추 측만으로 고통스럽게 노년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노년일까. 



 간혹 일을 처음 시작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아니 적어도 시간은 빨리 지나갔다. 그때와는 나의 나이와 몸 상태, 지역과 책상의 재질과 높이가 달랐다. 판판하고 쿠션 없던 딱딱한 의자에 하루 종일 앉아지내며, 엉덩이에 굳은살이 배길 듯했던 그때를 떠올린다. 누군가. 아무래도 ‘신’ 정도가 되어야 가능하겠지만, 나에게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냐고 제안한다면, 몹시도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엉덩이와 손목과 팔꿈치에 투명한 누런색 굳은살이 배기던 그때 말이다.


 십 수년이 지났으니 요령이 늘었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고, 더 이상 굳은살은 누렇고 두텁게 쌓이지 않는다. 항상 피해를 받는 약자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나보다 약한 자들이, 아니 나보다 적은 봉급을 받는 이들이 늘어났다. 월급의 앞자리는 몇 번이나 바뀌었고, 연봉의 앞자리도 수 번이나 변했다. 그러니까 지금의 약자들의 입장에서 ‘나’는 꽤나 그럭저럭 자알 지내고 있는 기성세대일 뿐이다. 현실에 안주할 만큼이나 적당함의 영역을 잘 지켜내고 있다. 적당히 일하고, 고통스러우며, 사랑하고 후회한다. 그리고 또 가끔, 적당히 남에게 친절을 베푼다.



 밥그릇 그득하게 한 끼를 때웠다. 요즈음 적당하지 않은 건 식사량뿐이다. 먹자마자 역한 기분이 들 정도로 위장과 식도에 맵고, 짜고, 들쩍지근한 음식을 쑤셔 넣는다. 그리곤 또다시 자리에 앉았다. 십 년도 훨씬 넘었다. 탁하게 누런 굳은살은 사라졌는데, 내장들은 그때보다 두 배는 더 불었다. 푸아그라용 거위에게 긴 호스로 콩을 먹이는 장면은 언제 봤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데, 순식간에 거위 배를 부풀리는 장면이 밥을 먹을 때마다 맹렬하게 스친다. 


 꽤나 적당히 월급을 받는 나는. 거위털이 잔뜩 들어있는 두터운 외투를 입고 퇴근한다. 그러니까. 거위처럼 밥을 먹으며 그들과 동조됨과 동시에, 조금 더 자유로워지는 순간에는 나 자신이 거위가 되어 버린다. 걷고 운전하고 다시 털을 벗어 옷걸이에 가지런히 걸어 놓는 거위는 또 한 번 위장이 터지기 직전까지 음식을 때려 넣는다. 확실히 지방이 잔뜩 올라 나의 간은 품질이 꽤나 좋을지도 모른다.     


 이제야 말 같은 말을 시작한 아들내미는 코알라에 대해 말해달라 한다. 거위밖에 모르는 아빠에게 코알라라니. 시큰둥하고 적당히 둘러댄다. 코알라의 기름진 간이 매우 비싼 요리 재료이고, 간을 살 찌우기 위해선 위장까지 닿는 긴 호스를 식도로 쑤셔 넣고 옥수수나 콩을 먹인다. 매우 값지고 희귀한 식재료가 되기 위해 유칼립투스 잎을 먹어야만 하는 자신들의 본성을 억누른다고 말했다.


 아이는 이미 ‘코알라’라는 단어를 내뱉을 때부터 한 20센티정도 되는 스테고사우르스 모형을 왼손에, 손가락 두 마디나 될까 싶은 갈색 티라노사우르스 피규어를 오른손에 들고 상황극에 빠졌다. 티라노는 자신보다 몇 배나 큰 초식공룡을 자신의 먹이라고 했다. 그렇게 배가 고픈 육식 공룡은 초식공룡을 잡아먹는다. 네 살 배기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삶의 규칙은 생존이고, 원인과 결과이며, 혹은 의도치 않은 이벤트다. 위장까지 긴 호스를 꽂아놓고 쉼 없이 먹어대는 나, 거위나 코알라나. 어쩌면 티라노까지 시간과 공간의 차이만 있을 뿐, 거북할 정도로 내장을 채워 넣는다는 입장에서 모두의 존재가치가 동일하다.     



 이건 여담이지만, 코알라가 하루 종일 위장을 채워 넣는 유칼립투스의 꽃말은. 추억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