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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둔형 최작가 Oct 14. 2021

사라져야 하는 날

2021. 연습#7.(211013)

The Red Kerchief (1868–73)  Claude Monet

“됐어, 이제 우리 서로 갈길 가도록 하자.”     


“아니 어떻게 말을 그렇게 할 수 있어?”     


“어차피 우리 ‘사라져야 할 때’가 30년도 남지 않았어. 너도 하루라도 빨리 새롭게 시작해”      


“왜 갑자기 ‘사라져야 할 때’를 말하는 거야? 그건 20년도 더 남은 일이라고.”     


“내 나이가 지금. 아니 네 나이가 몇 살인 줄 알기나 해? 결국 살아온 날들에 절반도 같이 못살아”     



  그녀가 말을 잇지 못했다. 하나도 틀리지 않은 말이니까. 마흔에 가까운 삼십 대가 결혼이라니. 이성적으로나 감성적으로도 말이 안 된다. 아직도 그녀는 우리 부모님 세대에서나 할 법한 기상천외한 생각을 했다. “내 남은 여생을 당신과 하고 싶소” 같이 감정에만 휘둘리는 생각 말이다. 철이 없다고 할지, 현실을 망각한 낭만주의자라 할지. 딱히 어떤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생각은 아닌 게 확실하다. 아버지는 4년 전 떠나셨고, 어머니는 올해 “사라져야 할 때”를 맞이하신다.     


  아침부터 낭만과 현실을 갈등하는 우리 둘은 꽤나 격렬하게 부딪혔다. 난 현실을 받아들였고, 그녀는 아니었다. “사라져야 할 때”가 생겨버린 이후, 이런 식의 고민과 다툼은 누구나 몇 번씩 경험하는 일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누군가 나서서 정확한 결론을 내주진 못했다.     


 담배나 술의 가격이 저렴해졌고, 마트에서도 쉽게 총이나 마약을 구할 수 있게 된 세상에서도 여전히 사랑이나 감정, 올바른 관계를 내세우며 생리학적 재생산의 의무를 다하려는 구시대적 인간들이 남아있다는 증거처럼 보인다. 물론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대부분 종교에 심취한 이들이다. 특히 자식을 많이 낳을수록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사라져야 할 때”가 생기기 이전보다 열심히 재생산 활동에 몰두했다.     


  모순된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매번 어떤 진영에 속해 살아가야 할지를 선택하게 된다. 그나마 위안이라고 볼 수 있는 건, 결정이 결코 의무는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하나의 진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인생의 사명감 따위는 없다. 짧은 인생을 한 없이 즐겨보고 싶은 마음도 없고, 사후에 구원받으리란 안도나 믿음도 없다. 그저 하루를 산다.     



“아버지. 이제 가세요?”     


“그래. 행복하게 남은 인생 잘 살아야 한다. 후. 회. 없. 이”     


“저도 많이 남진 않았어요. 지금까지 살아주셔서 감사해요.”     


“그래.. 너도 나의 아들로 살아줘서 고맙다. 이제 가마.”     


“어머니한텐 인사하셨어요? 마지막인데..”     


“어차피 오늘인걸 아는데.. 뭐. 지금 떠나지 않으면 미련이 남을 거 같아. 네 엄마한텐 잘 떠났다고 전해주렴”   


“아... 알겠어요 그럼. 문 앞까지만 이라도 모셔드릴게요”     


“괜찮다. 괜찮아. 좀 더 자라.”     


“......”     


  벌써 4년이나 지났다. 말 그대로 꿈처럼 사라지셨다. 아버지가 문을 나서는 모습이 생생한데, 떠나시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잠들었다. 생생한 꿈처럼 사라진 아버지를 그렇게 놓아드렸다. 어머니는 며칠 동안을 통곡하셨지만 배우자의 “사라져야 할 때”를 겪은 여느 사람들처럼 다시 기력을 회복하셨다. 우리 가족에겐 이제 아버지가 없지만, 누구나 그렇듯 우리에게 큰 변화는 생기지 않았다.     


“생각 좀 해봤어?     


“응. 생각을 해 봤는데, 날 떠난다는 사람 잡지 않기로 했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억지로 헤어지자고 했던 말처럼 들리네”     


“그럼 아니야? 30년도 못 사니까 같이 살 수 없다는 말이 떠난 다는 말이잖아”     


“그래 그럼 오해가 있었나 본데, 정확히 다시 이야기해보자. 내가 올해 37살이야, 그럼 ‘사라져야 할 때’는 정확히 23년 남는 거야 그렇지? 그럼 우리가 급하게 올해 결혼을 하고, 내년에 아이를 낳고, 그럼 난 벌써 38살이야. 22년 남는 거지. 그럼 우리는 육아를 위해 다른 여유도 없이 최소한 20년을 죽어라 일해야 해. 그럼 2년이 남지. 결국 우리가 아이에게 해방되어 함께 여생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딱 2년과 결혼해서 아이가 없던 1년 남짓의 시간일 거야. 금쪽같겠지. 행복할지도 몰라. 그런데 우리가 온전히 우리의 삶을 살아갈 기간이 3년밖에 없다면, 그건 너무 잔인한 행복 아니라고 생각해?”     


“아. 내가 너랑 함께하고 싶다는 게 잔인한 선택을 강요한 거구나. 알겠어. 더 붙잡지 않을 테니까, 너한테 행복한 여생을 선택할 기회를 줄 테니까 지금 당장 꺼져.”     


  그녀는 종교가 있다. 종교가 있는 사람은 주로 그들의 세상에서만 생활한다. 그들은 같은 종교를 가진 이들과 일하고, 교류한다. 게다가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자신의 종교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진학하니까. 다른 종교를 가지거나 외부인들을 평생 동안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관하다. 물론 간혹 자신들의 종교를 전파하기 위해 나처럼 종교가 없는 사람에게 접근하는 경우는 있다. 나는 종교가 없을 뿐만 아니라 마트에서 마약이나 사는 ‘에딕트족’도 아니기 때문에 전도를 하는데 가장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사라져야 할 때’가 생긴 이후에, 기존에 없던 새로운 종교, 기존의 종파에서 분리된 또 다른 종교가 생겼고, 그보다 많은 ‘에틱트족’이 생겼다. 에딕트는 ‘Addict’, 즉, 술이나 마약에 중독된 이들을 말한다. 어차피 60세면 끝나버릴 생을 술이나 마약을 비롯해 온갖 극단의 쾌락을 좇는다. 그들은 스스로를 ‘인생을 즐기는 현자(Wise Man, Enjoy Life)’라고 칭한다. 물론 당연하게도, 그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그저 술이나 약에 찌들어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으로 볼뿐이다. 특히 기존의 종교인들은 그들의 행동에 대해 큰 반감을 가지고 있다. 자신들의 가치와 맞지 않아 껄끄러운 마음이 있거니와 자신들의 종교를 확장하는데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일부 종교인들은 ‘에딕트족’을 하나의 신흥종교, 사이비 집단처럼 배척하고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어쨌든 ‘사라져야 할 때’가 생겨나고부터의 세상은 종교와 에딕트, 그 두 집단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나 같은 이들로 구성된 오합지졸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아버지도 어머니, 그리도 나도 모두 양극단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요즘 추세로 보면, 의외로 ‘에딕트’ 쪽으로 전형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사라져야 할 때’가 처음 생긴 20년 전에는 정반대의 양상을 보였다. 현세의 삶의 짧아진 만큼 영생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당연히 기존의 종교는 예전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규모가 커졌으며, 이 틈새로 수 없이 많은 신흥종교가 생겨났다. 20년이 지난 현재에선 더 이상 확장이 불가능할 만큼 종교의 규모와 영향력이 커졌기 때문에 ‘에딕트’족이 늘어나는 현상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사라져야 할 때’가 생기면서 국민에게 강요되던 거의 모든 의무가 점차적으로 사라졌고, 결국엔 ‘납세’의 의무만 남았다. 당연히 세금의 규모도 상당히 줄어들었다. 나이 든 사람이 사라지면서 생기는 일들이 꼭 이별이나 슬픔만 있는 게 아니었단 걸 사람들이 깨닫게 되었다. “사라져야 할 때”는 단순히 경제적인 이득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이유에서 시작되었다. 물론 누가 처음으로 제안했고, 어떤 과정을 통해 도입되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다만, 인류 전체의 생존의 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모든 사람이 공감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라져야 할 때’가 시작된 이후, 인류는 절반이나 감소했고, 모든 사람의 수입이 두 배 이상 증가했으며, 기아 문제가 사라졌고, 자원이 넘쳐나니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다. 학자들은 지금의 사회를 ‘가장 이상적인 자본주의’ 라거나, ‘인류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대’라고 표현한다. 군대를 해체하는 나라들도 생겨날 지경이니, 지금 내가 얼마나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를 내심 깨닫고 있다. 이토록 평화로운 세상에서 결혼이라니. 아무래도 그녀와 헤어지는 게 맞는 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이제 우리 그만 헤어지자”     


“결국엔 이렇게 나올 줄 알았어. 자긴 종교도 없으니까”     


“또 종교 타령이야? 종교가 없어도 결혼한 사람은 많아. 다만 다른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지, 나처럼 삼십 대, 게다가 삼십 대 후반이 결혼하는 일이 흔하지 않을 뿐이야.”     


“아니, 그건 핑계야. 책임질까 두려워하는 겁쟁이. 너도 ‘에딕트’와 별반 다를 게 없는 망나니일 뿐이었어”               


  그 이후에도 수 없이 내가 결혼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변명하고 둘러댔다. 겁이 나기도 하고 결국 내가 먼저 ‘사라져야 할 때’에 그리워할 누군가가 부담스럽기도 했다. 세상은 평온해져 가는데, 나는 이해할 수 없거나 겁나는 일들만 잔뜩 늘어만 간다. 술이나 마약 중독부터 시작해서 연애나 결혼, 출산, 육아. 어쩌면 우정이나 관계까지 모든 행위의 본질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모든 게 ‘사라져야 할 때’로 인해 생긴 변화들이다. 사라졌다 돌아온 사람이 없다. 그래서 사라진 이들이 어떻게 되는지, 죽는지 혹은 다른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른다. 정부와 언론에서도 철저하게 ‘사라져야 할 때’ 이후의 행적에 대해 어떠한 안내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죽는다고 치부해 버린다. 그래서 사라져야 하는 날이 생긴 이후부터는 우리의 수명이 강제적으로 60세가 되었다.     


  어머니가 올해 60세가 되었다. 바꿔 말하면  ‘사라져야 할 때’가 도래했다는 뜻이다. 영생이나 환생을 믿진 않지만,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가 어떤 형태로든 다시 돌아왔으면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래서 한 때, 결혼이나 출산을 생각하기도 했는데. 얼토당토않거니와 부모가 환생하여 내가 낳은 자식이 된다는 게 왠지 모를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포기했다. 누군가와 가정을 이루고 새로운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일이 무척이나 놀라운 경험이지만, 60세까지 밖에 되지 않는 한정된 삶을 유산처럼 물려줘야 한다는 점, 내가 떠나면 남겨질 사람들이 있다는 점은 결과적으로 결혼을 포기하게 만들게 했다.


  20년 전, ‘사라져야 할 때’가 시작되기 전에는 60세를 넘어선 노인들이 주인이었던 세상이었다. 누구나 100세 장수했고, 노인의 숫자가 최소한 삼분의 이는 차지했다. 게다가 훨씬 적은 수의 젊은이가 다수의 노인을 부양해야만 했다고 한다. 절망한 젊은이들은 결혼도 출산도, 게다가 연애도 우정도 관계도 모두 포기해야만 했다던데, 지금도 크게 달라지진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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