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 끝에서 본 세상

50화 초록이 쏟아지던 날

50화. 초록이 쏟아지던 날

《마루 끝에서 본 세상》


장마가 시작되면 시골의 모든 풍경은 초록으로 잠긴다.

온 들판이, 온 산자락이, 심지어 집 담벼락마저도

초록빛 물결에 잠기는 시기.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마루 끝에 앉아

나는 그 초록의 깊이를 오래 바라보곤 했다.


들판의 모는 어느새 제법 키가 자라 있었고,

논 사이로 흐르던 작은 물길은

비가 퍼붓는 날이면 폭포처럼 변했다.

엄마는 마루 끝에 널었던 고추며 마늘을

다급히 걷어 들이고,

나는 작은 동생의 손을 잡고

비 오는 마당을 종종걸음으로 뛰어다녔다.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다

잠깐 해가 얼굴을 비추는 순간,

너른 논 저편 하늘에

커다란 무지개가 걸린다.

색이 또렷하지 않아도

그 곡선 하나에 가슴이 벅차던 어린 날들.


장마철의 하늘은 종잡을 수 없었다.

아침엔 안개가 뿌옇게 깔리고

한낮엔 논둑 위까지 물이 찰랑이며

볕이 따가워지곤 했다.

그리고 해 질 녘이면

빗물에 반짝이는 논길이

하늘빛을 품고 조용히 반짝거렸다.


비 오는 날, 마루 끝에 앉아

나는 참 많은 상상을 했다.

초록 사이로 뛰노는 요정,

무지개를 타고 날아가는 새,

그리고 언젠가 나도

이 초록빛 마을을 떠나

세상 어디론가 무지개를 따라갈 수 있을 거라는

그런 막연한 꿈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는 그 시절 장마의 초록 속에서

자연의 리듬과 삶의 질서를 배웠다.

억수같이 쏟아져도

다시 걷히는 하늘처럼,

물속에 잠긴 들판도

언젠가는 다시 햇살 아래 반짝일 거라는 걸.


그 시절, 초록은 나에게

희망이었고 배움이었고,

잠시도 가만있지 않던 시간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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