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마켓 지나 이발소까지

12화

슈퍼마켓 지나 이발소까지


문희네 집을 지나 조금만 걸으면

넓은 과수원이 나온다.

봄이면 연분홍 꽃이 흐드러지고

여름이면 작은 풋사과가 옹기종기 열린다.

가을이면 무르익은 향이 바람에 실려

학교 가는 길이 온통 사과 냄새로 가득해졌다.

그 과수원을 지나는 길은

언제나 특별했다.


과수원을 지나면

마장슈퍼마켓이 나온다.

작고 오래된 슈퍼였지만

학교 가는 길에 꼭 들러야만 했다.

작은 유리 진열장 안엔

껌, 비스킷, 별사탕이 줄지어 놓여 있고

긴 나무 막대기 아이스크림은

여름날의 구세주였다.


나는 슈퍼에 아침에 한 번,

하교할 때 한 번,

꼭 들렀다.

뭘 사려는 것보다

그 안을 천천히 둘러보는 것이 좋았다.

내 눈엔 전부 보물이었고

가끔 주머니 속 10원이 내 손에 무언가를 쥐게 하는

마법 같았다.


슈퍼에서 조금 더 가면

유리창에 흰 커튼이 달린 이발소가 있다.

그곳은 늘 시원한 비누 냄새가 났다.

이발소집 딸, 미경이는

우리 반 부반장이었다.


사실

미경이가 특별히 나서거나

리더십을 발휘하는 모습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늘 조용히 중심에 있었다.


공부도 참 잘했다.

늘 반 1, 2등 안에 들었고

도덕책 읽는 목소리는

맑고 또렷해서 선생님도 자주 시키셨다.


얌전하지만 단단한 아이.

그게 미경이었다.


반장이나 부반장처럼 특별해 보이지 않아도

그 아이의 태도와 눈빛에는

보이지 않는 책임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모난 데 없이 반듯했고

늘 준비된 아이였다.


나는 미경이가 부러우면서도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웠다.

그 아이는 뭔가

‘어른스럽다’는 말이 잘 어울렸다.

우린 동갑이었지만

어쩐지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가끔 이발소 앞을 지나며

유리 안에서 머리를 감고 있는 미경이를 보면

괜히 모른 척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내 안의 어떤 쪼그라든 마음이

그 아이 앞에서 조용히 웅크리곤 했다.


그렇게 나는

문희네, 과수원, 마장슈퍼, 이발소를 지나

학교로 향했다.

길 위의 풍경 속엔

늘 아이들의 얼굴이 있고

그 속에서 나는 나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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