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골목

5화

– 저녁밥 짓는 시간

해가 뉘엿뉘엿 산등성이로 기울면 마당에도 긴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림자의 방향이 바뀌는 걸 보면 저녁이 다가오는 게 실감 난다.

그 시절 시골 농부들의 하루는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해가 가장 뜨거운 시간은 피해, 저녁 무렵이면 다시 집 근처 밭으로 나가 마지막 한 줄의 고랑도 정리했다.


우리 엄마도 그랬다.

어릴 땐 몰랐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 하루라는 시간 안에 얼마나 많은 일이 들어 있었는지 놀랍다.

밭일, 장보기, 아이들 챙기기, 남편 도시락, 김치 버무리기, 빨래 널기.

그리고 하루의 끝, 저녁밥 짓기.

그건 단순히 밥 한 끼를 짓는 게 아니라, 하루 전체를 정리하는 의식 같았다.


나도 나름 역할이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니 엄마는 나를 불때기 담당으로 임명했다.

연탄불 말고, 부엌 아궁이 불.

장작에 불을 붙여 알맞은 세기로 밥솥을 데우는 일.

처음엔 불이 안 붙어 엄마한테 혼나기도 하고, 연기 때문에 눈물을 줄줄 흘리기도 했다.


그래도 불이 활활 붙고, 솥뚜껑이 살짝 들썩이며 김이 새어 나오면 뿌듯했다.

그 김 냄새만 맡아도 오늘 반찬이 뭘지 슬슬 감이 왔다.

보글보글 된장찌개인지, 고추장 넣고 볶은 감자조림인지, 아니면 들깻가루 넣은 아욱국인지.

그 맛있는 냄새가 퍼지면 동생들도 하나둘 마당으로 모여들었다.


석유곤로도 내가 관리했다.

엄마는 무릎 꿇고 앉아 뭔가 할 때, 등 뒤에서 등을 받쳐주는 나를 좋아하셨다.

곤로 심지가 너무 타버리지 않게 조절하고, 기름통에 남은 양도 확인하는 게 내 일이었다.

그게 나름 책임감이었다.


엄마가 “미순아, 고추에 물 좀 줘라” 하시면 조루를 들고 동생과 둘이서 집과 밭을 몇 번이고 오갔다.

들고 가는 조루는 찰랑거리지만 돌아올 땐 발걸음이 가벼웠다.

한 번은 조루 물을 너무 넘치게 담았다가 신발까지 홀딱 젖기도 했다.

그래도 엄마가 칭찬 한마디 해주시면 그날은 밥 두 그릇은 먹었다.


어쩐지 그 시간엔 마음도 분주했다.

오늘 엄마가 뭘 해줄까, 혹시 들깨무침일까, 아니면 아카시아 꽃 튀김?

심부름하러 텃밭에 가면, 손에 잡히는 쑥, 부추, 방풍, 고구마순을 캐어 와서 엄마 손에 쥐어드렸다.

그때 엄마가 내 손을 한번 꼭 쥐며 “이쁜 거 좀 봐라” 하시면 가슴이 콩콩 뛰었다.


부엌에서는 도마에 칼질 소리가 났고, 가끔씩 엄마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불 꺼졌나 한 번 봐라!" 하고 소리치셨다.

그 말은, 밥 다 됐다는 신호였다.

솥뚜껑을 열면 김이 퐁퐁 솟아올라 얼굴을 덮었고, 나는 그 김 속에서 고소한 밥 냄새에 또 한 번 배가 고파졌다.


엄마는 늘 분주했지만,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안정감을 줬다.

부엌이 환하게 불 밝히고 있으면 마당도 덩달아 따뜻해졌고,

밥 짓는 냄새는 골목 너머 이웃집까지 퍼졌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었다.

밥 짓는 시간은 하루의 마침표였고,

그 마침표를 찍는 건 언제나 엄마의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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