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 끝에서 본 세상

14화 백옥 같던 미경언니

《백옥 같던 미경 언니》

– 오래된 천조각


언니는 참 예뻤다.

하얀 백옥 같은 피부, 조용한 눈빛,

말보다는 눈으로 먼저 마음을 전하던 아이.


나는 아빠를 닮아 까무잡잡한 편이었지만

작은언니 미경이는 엄마를 꼭 닮았다.

맑고 하얗고, 조용한 사람.


내가 다섯 살이던 해,

언니는 국민학교 1학년이 되었고

우리 집 저녁시간엔 작은 공연이 열렸다.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없던 시절.

식구들이 마루에 둘러앉으면

미경 언니는 국어책을 통째로 외워

종알종알 낭독했다.


“하늘이 맑습니다.

산이 푸릅니다.

나는 학교에 갑니다.”


책도 보지 않고 읊조리던 그 모습은

어린 내게 마법 같았다.

그때는 몰랐다.

그 평화로운 풍경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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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깊어질 무렵,

언니는 앓기 시작했다.

감기려니 했던 열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아빠는 며칠씩 언니를 업고 병원을 다녀오셨다.


언니는 말을 줄였고

느리게 걷거나

말없이 창밖을 보았다.


엄마와 아빠는

“언니 잘 지켜봐. 꼭 따라다녀야 해.”

하고 내게 신신당부하셨다.


나는 다섯 살짜리 두 다리로

언니를 따라다녔다.

숨이 차고 발이 아파도

언니 뒤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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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언니는 우물가 가장자리를 돌며 걷고 있었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언니가 발을 헛디디는 순간,

작고 하얀 몸이

우물 속으로 툭— 빠져버렸다.


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언니가! 언니가 물에 빠졌어요!”


동네 어른들이 달려와 언니를 꺼냈고,

그날 이후 언니는 더욱 말이 없었다.

걷는 날보다 누워 있는 날이 많아졌다.


아빠는

그 여름에 먹은 개고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날 이후로 아빠는

다시는 그 음식을 입에 대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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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모든 걸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제대로 이해했다.


고학년이 되어 세상을 조금씩 알아갈 무렵,

나는 알았다.


아빠가 왜 마당 끝에서 담배를 끊으셨는지.

엄마가 왜 한쪽에서 눈을 훔치셨는지.

미경 언니가 왜 그렇게 조용히 걷고 있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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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언니는 점점 백옥처럼 가늘어졌고

나는 그 언니를 따라 걷던

작은 그림자였다.


그리고 지금도,

등잔불 아래서 국어책을 외우던

그 하얀 얼굴과 목소리가

문득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온다.


“하늘이 맑습니다.

산이 푸릅니다.

나는 학교에 갑니다.”


그 문장은

언니의 목소리로

아직도 내 마음속에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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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는 15화, 《명절, 고요한 우리 집》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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