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책을 다 읽고서야 잠들 수 있었던 아이
15화. 책을 다 읽고서야 잠들 수 있었던 아이
나는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비로소 잠들 수 있는 아이였다.
한 장이라도 남겨두면
자꾸 그다음 장면이 상상 속에서 이어졌고,
결말이 궁금해 밤새 뒤척이기 일쑤였다.
아빠는 가끔,
서울역에서 얼결에 주문한 전집을 집으로 들여오셨다.
그 전집은 대개
내 나이엔 어울리지 않는 어려운 책들이었지만
나는 기꺼이 도전했다.
한 줄도 이해되지 않는 문장도 있었고,
등장인물의 말뜻조차 어렴풋한 경우도 많았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읽고, 또 읽고, 상상하고,
다시 처음부터 천천히 들춰보기도 했다.
어느새 그 전집들은
나만의 세계가 되었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욕망은
아마도 그 책더미 속에서 자란 듯하다.
한 권을 다 읽고 나면
나도 글을 써보고 싶어졌다.
내 머릿속에만 있던 이야기들을
종이에 적어 내려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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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 선생님은
그 막연하고 작은 꿈에 불을 지펴주신 분이었다.
시를 처음 썼을 때도,
낭독을 했을 때도,
선생님은 항상
내 마음을 꿰뚫는 말로 다정히 반응해 주셨다.
그날 이후,
나는 매일 아침
학교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아이가 되었다.
운동장에는 아직 이슬이 맺혀 있었고,
복도엔 누구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레 교무실 문을 두드리고
열쇠를 받아 교실 문을 열었다.
선생님이 안 계실 땐
당직실에 들러 조용히 인사드리고 돌아왔다.
그 시간들이
왠지 모르게 기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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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실도 나의 또 다른 공간이 되었다.
처음엔 읽지 못했던 책들만 눈에 들어왔지만
어느새 익숙한 책들보다
낯선 책을 찾는 재미에 빠져들었다.
무거운 책꽂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책 등을 하나하나 훑다가
읽고 싶어지는 책을 골라 들고 조심스레 자리에 앉았다.
김선태 선생님도
도서실에 자주 계셨다.
어느 날은
선생님이 자신이 직접 쓰신 책 한 권을 내게 건네주셨다.
그리고 앞장을 열어
예쁜 글씨로 내 이름을 적으셨다.
사인을 하신 뒤 이렇게 말씀하셨다.
“글을 쓴다는 건, 행복이란다.”
나는 그 말을 오래도록 기억했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주고,
책 한 권의 주인처럼 대해준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도서실에 더 자주 앉아 있게 되었다.
그곳은 내 마음이 조용해지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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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도서실에서
책을 읽고,
노트에 한 줄씩 문장을 적어보던 그 시간들이
지금도 내 안에 고요히 남아 있다.
김선태 선생님의 말처럼
글을 쓴다는 건
그때도 지금도
조용하고 단단한 행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