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가문의 명예, 그늘에 서 있던 아버지
26화. 가문의 명예, 그늘에 서 있던 아버지
아빠는 외가에서 자라셨다.
친아버지를 두 살 전에 여의고,
어머니인 할머니는 재혼으로 멀어진 뒤였다.
그래서였을까,
그 집의 누구도 아빠를 온전히 ‘식구’라 부르지 않았다.
그 시절,
외가댁은 마을에서 손꼽히는 가세를 자랑했다.
서울에 살던 외사촌들은 대부분 의사 거나 약사였고,
할머니의 오빠들은 일찍부터 서울살이를 했다고 했다.
명절이면
서울서 내려온 친척들로 외가댁은 북적였다.
지붕 위에 연탄 굴뚝이 연기를 내뿜고
큰 방마다 사람들이 꽉 들어찼지만,
그 틈에서 아빠는 항상 바삐 움직였다.
도시락을 나르고,
밥상을 차리고,
다른 아이들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았다.
그렇게 그는
한 번도 누군가의 손에 끌려
장에 나가 본 적도 없고,
“이건 네 거야”라며 받은 새 물건 하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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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저학년까지만 다니셨다고 했다.
그나마도 바쁜 농사철이면 빠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아빠는 글을 곧잘 읽고 쓰셨다.
한문까지 능숙하게 쓰시던 그 실력이
어떻게 생긴 건지,
어느 날 조심스레 여쭌 적이 있었다.
“밤마다 훈장 선생님 집에 갔지.
그땐 그 길이 무섭기도 했어.”
조용히 웃으며 말씀하셨다.
별빛을 따라 걷는 시골 밤길,
누가 깨우지도 않는데
스스로 책보를 메고 나가
불 밝힌 훈장 댁에 가 닿은 소년.
그 아이는 얼마나
배우고 싶었을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마음이 먼저 글자를 찾아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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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시절을 살아본 적 없지만
왠지 아빠의 손등에,
그 시절의 마디 굵은 외로움이
자국처럼 남아 있는 듯 느껴졌다.
할머니가 떠나신 뒤,
아빠는 장남도 아니고 친손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더 ‘집안일’을 했다.
그때 아빠에게
‘머슴’이란 말은 직접 붙지 않았지만,
실상은 그보다 더 깊은 고생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런 대가 없이,
아무런 기대 없이,
단지 그 집안의 ‘남겨진 아이’였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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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주 생각한다.
아빠는 왜 원망하지 않으셨을까.
왜 그 넓은 외가에서
자신이 누리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분노하거나 슬퍼하지 않으셨을까.
그건 어쩌면,
외롭지만 견디는 법을
너무 일찍 배워버린
아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치 누군가를 대신해서
세상 모든 책임을
혼자 진 사람처럼.
아빠는 그렇게
가문의 그림자 속에서 자라셨다.
그늘에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의 빛을 더욱 환히 밝혀주셨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