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세상과 나 사이

26화. 가문의 명예, 그늘에 서 있던 아버지

26화. 가문의 명예, 그늘에 서 있던 아버지


아빠는 외가에서 자라셨다.

친아버지를 두 살 전에 여의고,

어머니인 할머니는 재혼으로 멀어진 뒤였다.

그래서였을까,

그 집의 누구도 아빠를 온전히 ‘식구’라 부르지 않았다.


그 시절,

외가댁은 마을에서 손꼽히는 가세를 자랑했다.

서울에 살던 외사촌들은 대부분 의사 거나 약사였고,

할머니의 오빠들은 일찍부터 서울살이를 했다고 했다.


명절이면

서울서 내려온 친척들로 외가댁은 북적였다.

지붕 위에 연탄 굴뚝이 연기를 내뿜고

큰 방마다 사람들이 꽉 들어찼지만,

그 틈에서 아빠는 항상 바삐 움직였다.

도시락을 나르고,

밥상을 차리고,

다른 아이들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았다.


그렇게 그는

한 번도 누군가의 손에 끌려

장에 나가 본 적도 없고,

“이건 네 거야”라며 받은 새 물건 하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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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저학년까지만 다니셨다고 했다.

그나마도 바쁜 농사철이면 빠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아빠는 글을 곧잘 읽고 쓰셨다.

한문까지 능숙하게 쓰시던 그 실력이

어떻게 생긴 건지,

어느 날 조심스레 여쭌 적이 있었다.


“밤마다 훈장 선생님 집에 갔지.

그땐 그 길이 무섭기도 했어.”


조용히 웃으며 말씀하셨다.

별빛을 따라 걷는 시골 밤길,

누가 깨우지도 않는데

스스로 책보를 메고 나가

불 밝힌 훈장 댁에 가 닿은 소년.


그 아이는 얼마나

배우고 싶었을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마음이 먼저 글자를 찾아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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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시절을 살아본 적 없지만

왠지 아빠의 손등에,

그 시절의 마디 굵은 외로움이

자국처럼 남아 있는 듯 느껴졌다.


할머니가 떠나신 뒤,

아빠는 장남도 아니고 친손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더 ‘집안일’을 했다.


그때 아빠에게

‘머슴’이란 말은 직접 붙지 않았지만,

실상은 그보다 더 깊은 고생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런 대가 없이,

아무런 기대 없이,

단지 그 집안의 ‘남겨진 아이’였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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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주 생각한다.

아빠는 왜 원망하지 않으셨을까.

왜 그 넓은 외가에서

자신이 누리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분노하거나 슬퍼하지 않으셨을까.


그건 어쩌면,

외롭지만 견디는 법을

너무 일찍 배워버린

아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치 누군가를 대신해서

세상 모든 책임을

혼자 진 사람처럼.


아빠는 그렇게

가문의 그림자 속에서 자라셨다.


그늘에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의 빛을 더욱 환히 밝혀주셨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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