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조용한 편지, 하루하루 쌓이다

정숙의 시점

제12화. 조용한 편지, 하루하루 쌓이다

정숙의 시점


편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고 난 뒤, 나는 서랍을 열었다.

지난봄 생일날 어머니가 주신 흰 편지지를 조심스레 꺼냈다.

그 위에 연필을 들고 앉았지만, 한참을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음은 이미 가 닿아 있었지만

어떤 말을 쓰면 가벼워 보일까 봐,

어떤 문장은 부담이 될까 봐

종이 위를 맴도는 생각만 수십 번이었다.


마루 끝에 홀로 앉아 등뒤로 저녁 햇살이 들었다.

바람이 이마를 스치고, 멀리서 송아지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평화로운 시간 속에서

나는 천천히, 아주 조심스레 연필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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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의 답장 중에서]


> 윤호 씨께


편지를 또 받고, 참 많이 기뻤습니다.

요 며칠, 그 글을 베개 밑에 두고 잠들었습니다.


'다시 개울을 걷고 싶다'는 말씀…

저도 그 개울을 다시 걸을 때, 그날 생각이 나서

혼자서 웃기도 했습니다.


마음을 표현한다는 것이 이토록 조심스러운 일인 줄

살아 처음 느낍니다.


서울은 아직 바람이 찬가요.

저는 그저, 윤호 씨가 무리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다시 편지를 주신다면, 저도… 더 많은 마음을 담아볼게요.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정숙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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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투를 붙이고 난 뒤,

나는 마당 끝에 서서 한참을 우두커니 있었다.

누가 볼까 두려우면서도,

그가 그 편지를 받아보길 더 간절히 바랐다.


그 후로 둘 사이엔 마치 작은 길이 하나 열린 듯했다.

서울과 이곳 시골 마을 사이, 하루 이틀 걸리는 거리임에도

편지는 거의 매일 오고 갔다.


“또 왔다. 서울서.”

우체부 아저씨가 반쯤 웃으며 내게 봉투를 건네면

나는 걷잡을 수 없이 설레며 방으로 들어갔다.

편지는 언제나 단정했고, 문장은 따뜻했다.


그 사람은 바쁜 와중에도 내게 봄꽃 소식과

장충동 철물점 앞에 핀 살구나무 얘기를 전했고,

나는 논두렁 개구리 소리와, 장독대에 핀 달맞이꽃 얘기를 썼다.


처음엔 며칠에 한 번이었지만,

어느새 편지는 서로를 닮아

거의 매일처럼 찾아왔다.


단 한 번도 '좋다', '사랑한다'는 말은 없었지만

그 편지들은 세상 무엇보다 분명하게

우리 마음을 이어주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쑥스러웠지만,

편지를 기다리는 내 마음은

그 누구보다 솔직해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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