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기억의 골목 64화
엄마를 따라 간 장날
나는 엄마를 따라 장에 가는 날이 너무 좋았다.
자주는 아니었다.
정말 어쩌다 한 번,
엄마가 동생들을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맡기고
나만 데리고 가주셨을 때의 그 기분.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장에 간다고 하면
아침부터 분주했다.
엄마는 부엌을 왔다 갔다 하며
고추며 깨, 콩, 나물, 묵은지, 된장 같은 걸
작은 보따리들에 따로따로 싸셨다.
쌀자루에서 몇 도쯤 퍼내 천에 감싸고,
고춧가루나 마른 나물은 신문지로 정성껏 포장했다.
그렇게 해서
엄마는 짐보따리를 한 아름이고
나는 그 옆을 졸졸 따라나섰다.
우리 집에서 장터까지는
어린 내 다리로는 한참이었다.
그래도 엄마와 단둘이 걷는 길은
기분 좋은 소풍길처럼 느껴졌다.
엄마는 걷는 내내 말이 없으셨다.
하지만 조용히 숨을 고르며 걷는 그 모습에서
무언의 단단함이 느껴졌다.
“우리 컸으니까, 데려가는 거야.”
한 번쯤 그렇게 말해줄 법도 했는데
엄마는 그저 말없이 걷고, 나는 신나서 뒤따랐다.
장터에 들어서면
아스팔트는 없고 흙바닥이었고,
사람들은 목소리를 높여 물건을 사고팔았다.
생선 비린내와 기름 냄새,
쑥떡 굽는 향기와 방앗간에서 짜내는 참기름 냄새가
뒤섞인 그 혼잡한 공간이
내겐 아주 신기한 세계였다.
엄마는 장에 도착하면
들고 간 보따리들을 몇몇 단골 상인에게 나눠 팔았다.
고춧가루는 어느 할머니에게,
된장은 또 다른 상인에게.
엄마는 물건을 내어놓고
두세 마디만 나누고는 가격도, 무게도, 약속도
거의 말없이 정리하셨다.
그리고 다음 장날 가져올 물건들에 대해
주문이 들어오면
엄마는 고개만 끄덕이며 기억하셨다.
“고춧가루 한 됫박,
된장 한 되,
묵은지 반 말,
참깨 두 되…”
나는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었는데
도무지 저 많은 걸 어떻게 기억하시나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한 번도 메모를 하지 않으셨다.
그게 너무나 신기해서
나는 엄마를 쳐다보며 물은 적이 있다.
“엄마, 그거 다 어떻게 외워?”
그러자 엄마는
살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다 외워져.
장에선 그게 일이야.
헷갈리면 안 되거든.”
그때 나는 생각했다.
우리 엄마는 천재구나.
엄마는 학교도 못 다녔다지만
세상 모든 계산과 약속,
신용과 질서를
마치 몸으로 기억하듯 해내셨다.
그날 장에서
엄마는 콩나물과 멸치 한 봉지,
그리고 조청이 발라진 과자를 사주셨다.
작고 하얀 종이봉투에 담긴 그 조청과자.
나는 그것 하나로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돌아오는 길엔
아침보다 보따리는 가벼웠지만 장에서 사 온 먹거리들로
엄마의 발걸음은 더 무거워 보였다.
지친 얼굴에도
나는 과자 하나 손에 들고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다.
집에 돌아오자
이웃집 아주머니가 동생들을 돌봐주시고 있었다.
엄마는 짐을 부엌에 들여놓으며 인사를 했다.
“딸 데리고 장 다녀왔어요.
이 미숙이는 의젓해서 다행이에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왠지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오늘 엄마의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사람 같았다.
그날 밤,
엄마는 다시 고춧가루를 덖고,
나물을 손질하며
다음 장날을 준비하셨다.
나는 마루 끝에 앉아
장날의 그 많은 이야기들을
조용히 마음에 담았다.
엄마는
책은 몰라도
사람을 알고, 신용을 알고,
일과 사랑을 아셨다.
그런 엄마와 함께 걷는 장날,
그 길 위에서
나는 세상을 배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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