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골목

66화

by 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제66화 – 엄마의 숫자 노트

“엄마, 내가 한글 가르쳐줄까?”

마루 끝에 엎드려 책을 읽던 내가,
그날은 이상하게도 그렇게 말했다.
햇살이 마루를 덮고,
부엌에서는 칼질 소리가 일정하게 들려왔다.
내 말에 엄마는 잠시 손을 멈추고
익숙한 미소로 대답하셨다.

“엉… 근데 말이야, 한글보다 숫자부터 좀 알려줘 봐라.”

나는 놀란 눈으로 엄마를 바라봤다.

“숫자부터?”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시며 마루에 올라오셨다.
앞치마를 만지작거리며 앉으신 엄마의 표정은
어딘가 조심스러웠고, 또 간절했다.

“내 말 안 했지?
사실 나 숫자도 잘 몰라.
글씨는… 아예 못 읽고.”

나는 말문이 막혔다.
엄마는 그동안 글씨 없이 어떻게 장을 다녔을까?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의 주문을 받고,
돈을 주고받았을까?

“엄마, 그럼 그동안 어떻게 했어?”

엄마는 허허 웃으셨다.

“색깔 보고 버스 타고,
상표 모양 외워서 물건 사고,
사람 말 듣고 외워서 장 보고…
다 외웠지.
가게에서 얼마라 그러면
그 말을 머리에 넣어두고,
손가락으로 살짝살짝 더해보고.”

엄마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속엔 지난 세월의 고단함이 스며 있었다.
다른 사람에겐 당연한 숫자와 글자가
엄마에겐 벽이었다는 걸
그제야 나는 알았다.

“근데 말이다, 이제는 숫자만큼은 좀 알고 싶어.
글씨는 몰라도, 숫자라도 알면 좀 덜 억울하겠더라.”

나는 작은 공책을 꺼내
“1부터 10까지 써볼까?” 했고
엄마는 맨 앞장에 조심스레 숫자 ‘1’을 따라 쓰셨다.

삐뚤빼뚤한 그 숫자는
세상 어떤 글씨보다도 뭉클했다.

며칠 뒤,
엄마는 ‘2’와 ‘3’,
그리고 ‘5’를 정확히 쓰셨다.

“얘는 엉덩이가 두 개고,
얘는 꼬리가 한쪽으로 말렸네.”

모양으로 기억하는 방식은
그동안 색깔과 형태로 세상을 외워온
엄마만의 방법이었다.

엄마는 말하셨다.

“내가 장날마다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몰라.
사람들 앞에서 글을 못 읽는 게
어찌나 부끄럽던지…
그래서 그냥,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너한테도 오늘 처음 말하는 거다.”

엄마의 고백은 조용했고,
오히려 그것이 더 깊이 가슴에 박혔다.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을까…’

딸인 나는 그것조차 몰랐다.
늘 당당하고 부지런하고
무엇이든 척척 해내던 엄마였으니까.

그런 엄마가
조심스럽게 숫자를 따라 쓰며
“이거 맞아?” 하고 묻는 순간,
나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을 느꼈다.

그날부터 엄마의 작은 노트가 하나 생겼다.
수박값, 쌀 무게, 계란 한 판의 가격…
엄마는 하나하나 적으며 외우셨다.

그때 나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우리 엄마는 세상 누구보다도 똑똑한 사람이라고.
글씨는 몰라도,
세상의 질서를 외우고,
사람 마음을 읽고,
무게와 가격을 감으로 꿰뚫는 사람.

엄마는 까막눈이었지만,
세상을 훤히 내다보는 마음의 눈을 가진 분이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기억을 뀌메는 사람···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마루 끝에서 바라본 유년의 기억을 꿰메어 글을 씁니다.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꿰메어 언젠가는 나만의 ‘토지’를 완성하고 싶습니다.

175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14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306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매거진의 이전글기억의 골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