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골목

68화

by 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제68화 – 장남의 눈빛은 빠르다

엄마에게 한글을 가르치던 그 여름,
작은 식탁에 나란히 앉은 우리는
종이 위에 한 자 한 자 글자를 적었다.

엄마는 ‘장터’, ‘쌀’, ‘된장’처럼
생활에 꼭 필요한 단어들을 배우고 있었고,
나는 그 단어들을 커다란 글씨로 써서
벽에 붙이거나 직접 가르쳐 드렸다.

그때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이가 있었다.
우리 집 다섯 살 장남, 내 바로 아래 동생.

처음엔 색연필을 들고 장난치던 동생이
어느 순간부터는 조용히 내 옆에 앉아
엄마와 나의 공부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누나, 이거 ‘엄마’지?”
“응, 맞아.”

“그럼 이건? ‘쌀’?”

나는 깜짝 놀랐다.
별로 알려준 적도 없는데
동생은 내 손끝을 따라
글자들을 술술 읽기 시작한 것이다.

엄마도 처음엔 그냥 웃고만 계셨다.
“얘가 따라 하네~” 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으시더니,
어느 날, 동생이 ‘장터’라는 글자를 또박또박 읽어낸 순간
엄마는 눈이 동그래지셨다.

“얘 봐라, 우리 집 장남 똑똑하기도 하지…”

엄마는 정말 뿌듯한 얼굴이셨다.
마치 자랑스러운 훈장을 받은 듯한 표정으로
방 안을 환히 비추셨다.

동생은 글자를 외우는 속도가
내가 1학년 때보다 훨씬 빨랐다.
나는 ‘가, 나, 다’를 벽에 붙여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해 익혔는데,
동생은 옆에서 보더니
그 자리에서 따라 읽고
하루 만에 쓰기까지 시작했다.

“누나, 이건 ‘엄마’지?
그럼 이건 ‘밥’이야?”

“와, 너 이거 어떻게 알아?”

“엄마가 맨날 말하잖아. 밥 먹자~”

그 말에 나는 웃음이 터졌다.
그제야 알았다.
말을 글자에 연결 짓는 아이의 능력,
그리고 그 나이의 눈빛엔
놀라운 속도가 있다는 걸.

엄마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아주 작게 한숨을 쉬셨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나는 왜 그땐 못 배웠을까.
우리 애들은 이렇게 잘 배우는데…”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지금도 늦지 않았어.
엄마 이름도 쓸 줄 알잖아.
이젠 ‘된장’도 혼자 읽고.”

엄마는 웃으며
“그래, 된장은 읽지. 쌀도 읽고.”
하시더니
방 안에 붙어 있는 종이들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짚으셨다.

그날 이후
엄마의 공부는 동생의 호기심과 함께
자연스럽게 더 풍성해졌다.
둘이 마주 앉아
‘밥’, ‘국’, ‘된장찌개’를 따라 쓰는 모습은
작고 조용한 교실 같았다.

나는 그 모습을
방 문틈 사이로 바라보며
어딘가 모르게 뿌듯했다.

글자를 외워가는 엄마와
그걸 귀신같이 따라 읽는 동생.
이 작은 집에서
책상도 없이 앉은 마루 끝에서
새로운 배움이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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