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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골목

86화

by 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86화. 충무로 인쇄소에서 이어진 마음

아빠의 둘째 사촌은
서울 충무로에서 오래도록 인쇄소를 운영하셨다.

활판 인쇄소.
검은 잉크 냄새와 종이냄새가 섞인,
오래된 기계들이 쉼 없이 돌아가는 곳.

그곳에서 아빠는
다시 피붙이의 일터를 발견하셨다.

“형님, 형님도 젊을 땐 손재주 있었잖아요.
인쇄소 구경 한번 해보세요.”

그 말에
아빠는 가끔 남동생을 데리고
서울 작은 할머니댁에 다녀오셨다.
대개는 금요일 늦은 밤 기차를 타고,
일요일 저녁쯤 돌아오셨다.

“충무로에서 자고 왔다.”
아빠는 짐을 풀며 무심히 말씀하셨지만
표정에는 뭐라 말 못 할 안정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곳에서 사촌과 마주 앉아
붕어빵을 나눠 먹으며
짧은 대화 속에서도
형제 같은 따뜻함을 느끼셨던 것 같다.

“너 작은할머니댁에 가봤니?
뒤꼍에 감나무가 있어.
가을엔 감이 어찌나 빨갛던지…”

아빠는 그 감나무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감나무는
그분과의 관계처럼
해마다 묵묵히 열매를 맺고 있었다.

어느 겨울,
둘째 사촌이 시골에 오셨다.
눈이 소복이 쌓인 논길을 걸으며
아빠와 둘이 눈을 맞고 서 있었다.

“형님,
우리 이렇게라도 자주 보게 돼서
참… 다행이에요.”

그 말에
아빠는 고개만 끄덕이셨다.
그리고
잠시 뒤 내게 조용히 말씀하셨다.

“핏줄이란 게 말이지…
어딘가에 살아만 있어도
자꾸 당긴다.
그게 참 신기하다.”

나는 그 말을
한참 동안 곱씹었다.

핏줄.
그건 단순히 혈연의 개념을 넘어서
삶의 외로움을 버텨주는
보이지 않는 끈일지도 모른다고.


---

그 후로도
아빠는 가끔 서울에 다녀오셨다.
돌아오실 때면
작은 종이봉투 안에
인쇄소에서 나온 달력이나
인사장 샘플 같은 걸 가져오셨다.

“요즘은 이런 것도 해.”
아빠는 내게 그런 걸 건네며
사촌이 새로 만든 디자인이라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아빠는 인쇄소 냄새 속에서
친가의 기억과,
형제 같은 사촌의 존재를
조금씩 마음속에 쌓아가셨다.

그리고 나는
아빠의 그 여정을 보며
핏줄이라는 건
피보다 더 진한 ‘시간과 기억’으로
서로를 잇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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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끝에서 바라본 유년의 기억을 꿰메어 글을 씁니다. 삶의 조각들을 하나씩 꿰메어 언젠가는 나만의 ‘토지’를 완성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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