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 끝에서 본 세상

37화 이발소에 처음 간 날

《오래된 천조각》

37화. 이발소에 처음 간 날


햇살 좋던 어느 봄날,

아빠는 조용히 내 손을 잡으셨다.

“이발하러 가자.”


나는 구멍가게 앞을 지나

더 멀리, 더 길게

아빠 손에 끌려 걸었다.

왜 아빠 따라 걷는 길이

그리도 재미있고 설레었는지.


이웃 마을은 우리 동네보다

뭔가 더 크고 풍성해 보였다.

가게도 회관도,

심지어 담벼락과 나무까지도.


집들이 더 촘촘하게 모여 있는 그 마을,

언덕 위 조금 떨어진 한 집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봤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빨간 초록 원형 간판.

“저게 이발소란다.” 아빠가 웃으며 말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이발사 아저씨,

반짝이는 의자에 앉은 사람들,

거울 앞에서 두런두런 웃는 얼굴들.


나는 긴장과 호기심이 뒤섞인 눈으로

그곳을 둘러보다가

비슷한 또래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그 순간부터 나는

아빠 옆에 붙어 그의 옷자락만 자꾸 잡았다.


“밖에서 같이 놀아도 돼.”

아빠는 내 등을 살짝 밀어주셨다.


그날 나는

처음 보는 아이와

낯선 마당에서 고무줄놀이를 했고,

햇살 아래

아빠 머리에 내려앉는 가위질 소리를 들었다.


돌아오는 길,

아빠의 머리는 더 짧아졌지만

걸음은 더 가벼워 보였다.


나는 그날을 잊지 못한다.

작은 동네를 벗어나

세상을 처음 조금 더 멀리 내디뎠던 날.


그리고

아빠의 손을 놓치지 않고

처음으로 뱅글뱅글 돌아가는 간판 아래 섰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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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이야기 예고: 38화 – 빗물받이 속 개구리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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