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이대 앞, 꽃과 액세서리, 그리고 젊음」
---
서울 생활이 조금씩 익숙해지던 무렵,
나는 이대 앞 골목을 자주 맴돌았다.
여대가 모여 있는 지역엔 언제나 사람이 많았고,
그만큼 장사도 잘된다는 걸
경험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종로나 명동에 비하면 비교적 단속도 느슨했고,
골목 사이사이마다 작고 낡은 가게들이
무심한 듯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내가 장사했던 건 이대 후문 근처였다.
정확히 말하면 “고정된 자리”는 없었다.
장사란 게 원래 그렇다.
특히 노점은 더더욱.
아침 일찍 가야 좋은 자리를 맡을 수 있었고,
날씨나 유동인구, 경찰 단속 루트에 따라
매일 장사를 펼치는 위치도 달라졌다.
처음엔 중고 옷가지 몇 벌과 양말,
그다음엔 액세서리로 영역을 넓혔다.
귀걸이, 머리핀, 반지—
여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작은 물건들을
남대문 시장에서 떼다가 팔았다.
값은 쌌고,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하루 벌어 2~3만 원씩 남기던 날은
그날 밤 라면 국물이 괜히 더 짭짤하게 느껴졌다.
어느 날은, 길을 걷다
거리 꽃장수가 파는 작은 꽃다발을 보게 되었다.
“저거, 내가 팔아도 괜찮겠는데?”
그렇게 해서 액세서리 옆에
꽃도 함께 놓기 시작했다.
3천 원짜리, 5천 원짜리 꽃다발은
생각보다 잘 팔렸다.
남자 친구를 기다리던 여학생,
친구 생일 선물 사러 나온 사람,
그냥 자기 방에 꽂아둘 작은 꽃이 필요한 사람들.
그때부터 난 조금씩 감을 익혀갔다.
무엇이 팔릴지 예측하고,
누가 지나가는지 관찰하고,
언제 목소리를 내야 하는지를 감으로 알아갔다.
장사는 타고나는 게 아니라
버티면서 배우는 거라는 걸
몸으로 겪으며 알게 되었다.
하지만 늘 좋은 날만 있었던 건 아니다.
단속은 하루에도 몇 번씩 들이닥쳤고,
순식간에 짐을 싸서 골목길로 도망쳐야 할 때도 있었다.
물건을 땅에 떨어뜨리면
깨지거나 망가지는 건 고스란히 내 손해였다.
자리싸움도 있었다.
“여기 어제 내가 했던 자리야.”
“나도 며칠째 이 자리에서 했는데 왜 이래.”
서로 눈치 싸움하다,
말싸움이 커지고,
때론 손찌검도 나는 일도 있었다.
그럴 땐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나는 싸움보다 살아남는 게 목적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늘 보따리를 안고 다녔다.
부피에 비해 묵직한 짐,
등은 땀에 젖고 손바닥은 늘 거칠었지만
그게 내 하루의 무게였다.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릴 때면
숨이 턱턱 막혔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어머니’를 떠올렸다.
허리가 굽도록 논밭을 오가던
그 어머니의 뒷모습.
겨울이면 손등이 갈라져 피가 배어나고,
여름이면 땀에 절어 손수건 한 장 들고도
말없이 하루를 견디던 사람.
그런 사람을 위해
내가 창피하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거리에서 물건을 펼쳐놓고
누군가가 지나가다 피식 웃을 때도 있었지만
나는 한 번도 내가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 없다.
그저 젊었고,
돈을 벌어야 했고,
어디서부터라도 시작해야만 했으니까.
그리고 점점,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조금씩이라도 모은다면
언젠가 뭐라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는
내 물건을 진열할 수 있는
내 공간 하나쯤은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은 찬 바닥 위에 펼쳐진 비닐포장지 위에서
꽃과 귀걸이를 팔고 있지만,
다음엔 지붕 있는 작은 가게,
그다음엔 간판 있는 상점으로
발을 옮겨갈 수 있지 않을까?
그때 나는
그걸 ‘희망’이라고 불렀다.
젊음이란 그런 거였다.
지금이 힘들고, 불편하고, 때론 외롭더라도
내일은 조금 나아질 거라고 믿는 마음.
그게 아니면 어떻게 하루하루를 견딜 수 있었겠는가.
한겨울 찬바람 맞으며
보따리를 껴안고 골목길을 걷던 그 시절,
나는 늘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벌면, 조금만 더 모으면…
반드시 내 자리를 만들 수 있을 거야.”
그 말이 나를 오늘 여기까지
데려다준 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