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농사, 나를 일구다》

1화

그 땅이 나를 부른다

– 괴산에서 농사를 시작한 50대 여성의 이야기

나는 괴산 시내에 산다.
시장도 가깝고, 병원도 근처다.
내 삶은 조용하고 단정했다.
그렇게만 계속 살아갈 줄 알았다.
그런데 5년 전,
아버지께서 남기신 고향 땅이 내게로 넘어왔다.
연풍면 깊숙한 곳,
사람이 거의 드나들지 않는 언덕배기 밭이었다.

그 땅을 처음 마주한 날,
나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풀이 허리까지 자라고,
옛 담장은 이마를 찌를 만큼 휘어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곳은 낯설지 않았다.
마치 잊고 있던 내 일부가
그 자리에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느낌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군청에서 편지가 왔다.
“해당 농지는 농업 목적에 부합하지 않아
강제 처분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전화를 걸었더니
“농사 안 지으면 파셔야 해요.”
딱 잘라 말한다.

문득 마음이 거슬렸다.
"왜 내가 포기해야 하지?"
그건 단순히 땅 한 조각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시간,
우리 가족의 뿌리,
그리고 나라는 사람의 시작이었다.
그걸 이렇게 쉽게 내놓을 수는 없었다.

남편은 말했다.
“그걸 왜 네가 해?
지금도 바쁜데 농사까지?
내가 그런 거 도울 줄 알아?”
정색한 건 아니지만,
한 발도 가까이 다가서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혼자 시작하기로 했다.

처음엔 유튜브로 "잡초 뽑는 법"부터 검색했다.
호미는 장갑 사이로 자꾸 빠졌고
가시덤불에 다리며 손등이 남아나질 않았다.
하지만 조금씩,
땅의 언어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침에 이슬이 많은 날은
흙이 부드럽게 갈렸고
바람이 서늘하면 벌레가 사라졌다.
그리고
"오늘도 와주셔서 고맙다"는 듯
작은 들꽃이 발밑에 피어 있었다.

주말이면 괴산 시내에서
장 보듯이 장화를 챙기고
커다란 모자 하나 눌러쓰고 그 땅으로 간다.
내가 돌아가도 아무도 반기지 않던 그 밭은
이제는 내 손길을 기억한다.

군청에 가서 담당자와 얘기도 나눴다.
“사과나무 몇 주라도 심어보려 해요.
지금 밭 정비 중인데요,
조금만 시간 주세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 젊은 공무원은 웃으며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 주세요"라고 했다.
처음이었다.
도움이라는 말이 그렇게 따뜻하게 들린 건.

지금 나는
그 땅에 작지만 진심을 심고 있다.
시내로 돌아오면 몸은 녹초지만
마음은 도리어 가볍다.
살아 있는 느낌이랄까.

남편은 여전히 내 농사일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언젠가
그도 내가 일군 밭에 핀 첫 사과를 보게 될 것이다.
그 사과를 한입 베어 물고
“괜찮네” 한 마디 해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나는 지금,
인생 후반의 새 일을 시작하는 중이다.
늦지 않았다.
땅은 언제나 나를 기다려 주었고
이제는 내가 그 땅을 지키고 있다.

겨울의 공부

– 그 땅을 다시 일구기까지

군청 직원과 통화한 그날 이후,
나는 뭔가에 쫓기듯 겨울 내내 농사 유튜브를 파고들었다.
어떤 흙이 좋은지,
사과 가지는 언제 잘라야 하는지,
그리고 밭 정리는 어느 순서로 해야 하는지.
생전 해본 적 없는 말들이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였다.

사실 그 땅은 ‘전’으로 등록되어 있었지만,
누가 봐도 임야에 가까운 험한 밭이었다.
두세 번 넘어지지 않고는 오르기 힘들었고,
비라도 오면 진창처럼 미끄러웠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거기에 사과나무를 심으셨다.

그 사과나무들이,
아버지가 떠나신 뒤엔 점점 방치됐고,
나는 어느 순간 그 나무들을 다 베어버렸다.
남의 밭에 가지가 넘으면 안 된다고,
벌레라도 옮겨 붙으면 민폐라며,
그게 맞는 일이라 믿고 베어냈다.
속이 너무 쓰렸다.

이제 와 돌아보면
그건 민폐를 막기 위함이 아니라,
**‘그 땅을 더 이상 책임질 자신이 없던 내 마음의 표현’**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때
사과나무보다도
그 땅 자체를 포기했던 거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 겨울, 나는 다시 배웠다.
아버지가 그토록 애쓰던 이유도,
사과 한 알을 키우는 데 걸리는 계절의 깊이도,
그리고 내가 다시 그 땅을
'내 이름으로, 내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책임도.

그 겨울은 추웠지만,
그때 나는 다시 시작했다.
눈 대신 흙을 읽는 법을 배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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