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 끝 추리
《마루 끝 추리》 25화. 비어 있던 사진 속의 사람
이틀 전, 연주는 사진첩을 들고 서울로 돌아왔다. 마루 끝 방에 있던 오래된 가죽앨범에는 익숙한 얼굴들과 함께 낯선 사람들이 몇 장 섞여 있었다.
그중 한 장, 창호지 문 옆에서 웃고 있는 젊은 사내.
흑백사진 속 그는 어쩐지 뺨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고, 아버지와 비슷한 느낌을 풍기면서도 분명 낯선 이였다.
“이 사람, 누구야…”
엄마는 몰랐다. 작은 고모도, 외숙모도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군복 입은 사진 바로 옆에 끼워져 있었다. 낡은 필름자국, 곁에 쓰인 흐릿한 연필 필체.
‘용춘이 형, ’ 72년 여름’
연주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형…? 누구 형?”
그 순간 떠오른 건 지난겨울, 우연히 듣게 된 아버지의 낮은 중얼거림이었다.
“그때 그놈만 없었어도… 다르게 됐을 거야…”
아버지는 살아생전 거의 화를 내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술에 취했을 때, 극히 드물게 그런 말들을 뱉곤 했다.
그리고 다음 날이면 기억 못 하는 척, 아니 정말 기억나지 않는 듯 행동했다.
‘용춘이 형’은 누구였을까?
왜 그 사람만 없었어도,라고 했을까?
연주는 앨범을 들고 시립기록보관소를 찾았다. 1970년대, 연풍면 마을 주소지와 세대주 명단을 조회했다.
‘윤용춘’
1971년까지 연풍면 ○○리 238번지에 거주, 이후 상주 전출.
이름은 맞았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과 시기가 겹친다.
그 주소는… 연주의 외가와 단 200미터 남짓한 거리였다.
연주는 곧장 상주 시청 인근에 있는 주민센터로 향했다. 전입기록이 끊긴 지 오래였지만, 노인복지센터에 등록된 ‘윤용춘’이라는 이름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현재 81세, 치매 초기로 인근 요양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말과 함께.
며칠 뒤, 연주는 조용히 병원을 찾았다.
“할아버지, 저… 예전에 연풍에 살던 박상만 씨 아세요?”
연주는 아버지 이름을 조심스레 꺼냈다.
노인의 눈이 흔들렸다.
희미하지만 순간, 뭔가 기억 속 조각이 떠오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만이… 말랐지. 눈 맑은 애였어. 근데… 내가… 그 아이를…”
말은 끊겼지만, 그 눈빛은 분명 후회로 젖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입을 가린 채, 입술을 달싹이며 말없이 울고 있었다.
며칠 후, 연주는 요양병원을 나와 다시 마루 끝방으로 향했다.
사진첩에서 윤용춘의 사진을 꺼내 다시 들여다봤다.
웃고는 있지만, 눈은 웃지 않는 사내.
그가 아버지에게 남긴 건 무엇이었을까.
연주는 그날부터 아버지의 일기를 찾기 시작했다.
벽장 속에, 묵은 옷 아래, 아버지의 손때 묻은 작은 수첩 하나가 있었다.
그 안에는 또박또박, 아버지의 어린 시절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다.
‘오늘도 용춘이 형이 나 대신 혼나줬다. 마루에서 깨진 유리창은 사실 내가 던진 돌 때문이었는데…’
‘형은 날 자꾸 데리고 다녔다. 여우굴 찾으러 가자고도 했고, 계곡 넘어 숨은 집도 보여줬다.’
‘어느 날부터 형이 자꾸 무서워졌다. 나를 보는 눈이 이상했다. 나한테… 그날…’
그 페이지는 찢겨 있었다.
그리고 수첩 맨 뒷장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용춘이 형은 혼자였다. 너무 일찍 혼자였고, 너무 무서웠다. 나는 그걸 몰랐다. 그러면서도 용서할 수 없었다.’
연주는 손에 쥔 수첩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이 모든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씩 맞춰가며, 아버지를 다시 알아가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그를 용서하지 못했던 걸까.
아니면 이미 용서했고, 그래서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던 걸까.
창밖으로 저녁 햇살이 비쳤다. 마루 끝에 걸터앉아 있던 연주의 발끝에도 빛이 닿았다.
그 순간, 누군가 뒤에서 조용히 물었다.
“그 수첩… 아빠 거야?”
그건 작은오빠였다.
그는 잠시 서울에 올라와 있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일찍 내려온 모양이었다.
“형… 이거 알아?”
연주는 수첩을 건넸고, 오빠는 잠시 침묵했다.
“이 이야기, 나도 들은 적 있어. 아주 어릴 때… 아버지가 내게 했어. 근데 그땐 그냥 헛소리인 줄 알았지.”
두 남매는 아무 말 없이 마루에 앉아 있었다.
저 멀리 산등성이 너머에서 밤벌레 소리가 슬그머니 깨어났다.
“연주야, 이제 너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아버지가 왜 자꾸 같은 꿈을 꿨는지…”
오빠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는 작은 나무 상자를 건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이걸 내게 맡기셨어. 아무에게도 열지 말라고. 근데 이제… 네가 열어봐.”
상자 안에는 다시 접힌 편지 봉투 하나와, 오래된 은반지가 들어 있었다.
편지의 겉면엔 아버지의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연주에게. 늦은 고백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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