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웃긴 게 제일 웃겨

24화 – 페인트의 역습

by 기억을 뀌메는 사람 황미순

그냥 웃긴 게 제일 웃겨 24화 – 페인트의 역습

우리 마당 한편에 있는 창고에는 별별 물건이 다 있지만, 특히 눈에 띄는 건 페인트칠 도구들이다.
붓, 롤러, 페인트통, 신문지, 그리고 ‘이게 왜 여기에 있지?’ 싶은 스프레이 캔까지.
집주인아저씨는 오래된 집을 조금씩 고쳐 쓰는 스타일이라, 마당 살림살이 절반은 이 창고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밀번호는 여전히 0000.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열 수 있는 이 창고는, 사실상 우리 마당 사람들의 공동 창고다.
101호 아주머니는 꽃 화분 칠한다고 파스텔톤 페인트를 꺼내가고, 102호 아저씨는 “우리 집 대문이 우중충하다”며 파란 페인트를 빌려갔다.
그리고 나는… 그저 구경만 했다.
왜냐면, 나는 붓을 잡으면 꼭 무슨 일이 생기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우리 집 현관문 아래쪽에 ‘쩍’ 하고 금이 간 걸 발견했다. 기름보일러 탓인지 열이 나갔다 들어갔다 하면서 나무가 벌어진 거다.
그걸 보고 있던 101호 아주머니가 말했다.
“그거 그냥 페인트로 덮으면 돼요. 창고에 가서 흰색 페인트 가져와요.”

나는 혹시 몰라서 창고로 가, ‘흰색’이라고 적힌 통을 들고 나왔다.
뚜껑을 열자마자, 뭔가 이상했다.
냄새가… 청량했다.
페인트 냄새가 아니라, 마치 치약 냄새 같은.
그래도 “페인트도 여러 종류가 있겠지” 하고 롤러에 묻혀 현관문 아래를 쓱쓱 발랐다.

5분 후, 나는 진실을 알았다.
그건 흰색 페인트가 아니라 ‘타일 방수제’였다.
게다가 광이 나는 타입이라, 내 현관문 아래쪽만 유난히 번쩍거렸다.
멀리서 보면, 현관문이 나를 향해 ‘치아 미백 광고’처럼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102호 아저씨가 지나가다 웃음을 참지 못했다.
“형, 집이 ‘튜닝’됐네요. 여긴 마당이고, 저기는 클럽입구 같아요.”

웃음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며칠 뒤, 집주인아저씨가 들렀다.
“어? 여긴 내가 안 칠했는데 왜 이렇게 번쩍거려?”
“아, 그게… 제가 조금 칠했어요.”
“그거 방수제잖아요. 겨울에 눈 오면 거기만 얼지도 몰라요.”
그날부터 나는 눈이 오면 현관 앞에서 스케이트를 탈 준비를 한다.

그리고 두 번째 사건.
101호 아주머니가 창고에서 페인트를 빌려다가 자기 집 화분대 칠을 하다가, 실수로 페인트를 바지에 흘렸다.
그걸 세탁해도 안 빠지자, 아예 바지를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결국 바지 앞에는 파스텔톤 꽃무늬가, 뒷주머니에는 하트가 생겼다.
마당에 그 바지를 입고 나오면,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아~ 봄이 왔네요.”

세 번째 사건은 나와 102호 아저씨의 합작품이다.
어느 날, 102호 아저씨가 자기 집 대문을 파란색으로 칠하겠다고 했다.
나는 심심해서 도와주겠다고 했는데, 바람이 유난히 세던 날이었다.
스프레이 페인트를 ‘칙칙’ 뿌리는 순간, 바람이 방향을 틀어 내 얼굴 절반을 덮었다.
그날 밤, 거울 속 내 얼굴은 정확히 두 가지 색이었다. 왼쪽은 원래 피부색, 오른쪽은 바다색.
101호 아주머니는 그걸 보고 말했다.
“오~ 오늘 콘셉트는 아바타네요.”

그 뒤로 나는 창고의 페인트 구역에 접근금지령이 내려졌다.
집주인아저씨는 “페인트는 칠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칠하네”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 창고는 여전히 우리 마당 생활의 핵심이다.
누군가는 꽃 화분을 칠하고, 누군가는 대문을 칠하고, 누군가는(나) 현관문에 방수제를 바른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마당 한가운데서 온 동네 구경거리가 된다.

아마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냥 낡은 창고겠지만, 우리에겐 매달 새로운 에피소드가 탄생하는 무대다.
비밀번호 0000은 오늘도 우리를 웃음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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