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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나에게서 흩어질 때

작가의 말

사랑이 나에게서 흩어질 때

작가의 말

이 이야기는 어떤 거창한 사랑을 말하고 싶어서 시작한 글이 아니다.
누군가의 시선에서 멀어지는 순간 느껴지는 작고 조용한 아픔들,
그 아픔을 견디며 결국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과정을
차분히 기록해보고 싶었다.

사랑이 우리에게 늘 다정한 얼굴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기다림의 방식으로,
때로는 외면의 형태로,
또는 미세하게 달라진 온도로 다가온다.
그 변화들을 단번에 알아채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내는 시간이
사실 가장 긴 진통이라는 것을
이 글을 쓰며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마음이 뒤돌아보는 사랑을 겪는다.
하지만 그 이별의 결론이 언제나 상처일 필요는 없다.
내가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하고,
나를 온전히 바라봐주는 사람을 만날 준비를 하는 시간일 수도 있으니까.

이 글이 누군가의 오래된 상처를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누군가에게는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하고
작은 위로로 스며들기를 바라본다.

흩어져 가는 마음속에서도
우리는 결국 다시,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새로운 사랑을 맞을 힘을 얻게 된다.

이 글 역시 그런 힘을 나누고 싶어 쓰는 이야기다


프롤로그 — 사랑이 나에게서 흩어질 때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끝나지 않았다.
아주 사소한 순간들, 작게 흔들리는 눈빛과 짧아진 말끝, 설명되지 않는 침묵의 결들이 조금씩 쌓여
어느새 하나의 결론이 되어 있었다.

그 사람의 시선이 더 이상 나에게 머물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매번 마음으로 먼저 알아버리는 사람이라는 것.

그의 말보다 눈빛이 더 정직하다는 걸 알았고,
그의 행동보다 침묵이 더 많은 걸 말해준다는 것도 알았다.
사랑이 끝날 때는 큰 소리가 나지 않는다.
그저 바람이 빗장을 살짝 밀어내듯,
눈에 보이지 않는 틈으로 서서히 흩어질 뿐이다.

나는 계속 같은 자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나만 남겨졌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야 깨달았다.
그가 나를 지나쳐 다른 누군가를 바라보는 순간마다
내 가슴은 작은 파편처럼 부서져 흩어졌고,
그 흩어진 조각들을 주워 가슴에 다시 눌러 붙이느라
나는 점점 지쳐갔다.

사랑 앞에서 서러웠던 건
그가 다른 곳을 바라본다는 사실보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했던 나 자신이었다.
그는 이미 저만큼 멀리 가 있었고
나는 그제야 뒤늦게 멈춰서는 사람이었다.

더 이상 내 마음이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그에게 향하던 발걸음을 거두기로 했다.
사랑이 나에게서 흩어지는 순간,
나는 비로소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젠가,
흩어지지 않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이
다시 찾아오기를 조용히 믿어보기로 했다


심야 버스에서 — 1화

심야의 공기는 낮보다 묵직했다.
지방으로 내려가는 첫 버스를 타기 위해 서둘러 집을 나섰고,
그 시간에도 터미널로 향하는 시내버스는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피곤한 얼굴들, 어디론가 돌아가는 마음들, 누구를 떠나온 표정들…
버스 안은 다양한 이유를 품은 사람들로 작은 세계가 만들어져 있었다.

자리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기대와 다르게 맨 뒤쪽 창가에 한 자리 비어 있었다.
조용히 앉아 심야의 흔들림을 따라가려던 그때—
옆자리의 남자가 휴대폰 화면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손가락이 쉴 틈 없이 화면을 두드리고,
그의 눈빛은 누군가에게 말을 전하려는 사람처럼 진지했다.
심야의 버스 안, 그 집중하는 모습이 이상하게도 나의 시선을 끌었다.
호기심에 아주 잠깐, 정말 아주 잠깐 그의 화면을 스치듯 보게 되었다.

그러다 마주친 눈빛.
그는 놀라지도 않고, 오히려 미묘하게 웃었다.

“이 시간에 이동하시는 거예요?”
그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 말 한마디가 이상하게 마음의 긴장을 풀어놓았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되었고,
서로의 목적지, 지금 가는 이유,
이 시간에 집을 나선 사소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버스는 심야의 도로를 천천히 미끄러져 나갔고,
우리는 낯선 사람인데도 오래된 지인을 만난 듯 편안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다 결국 카톡 아이디까지 교환하게 되었다.

새벽의 공기처럼 선명하게,
그 순간만큼은 ‘누군가에게 발견된 느낌’이 들었다.
사랑이 흩어지던 시기였음에도,
이상하게 그 밤의 만남은 마음 한쪽에 작은 빛처럼 들어왔다.

버스가 터미널 근처에 도착하자,
그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조심히 내려가세요.
오늘… 덕분에 심야 버스가 덜 피곤했네요.”

그 말은 단순한 인사였지만
새벽 공기 속에서 그 말이 유난히 또렷하게 마음에 남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웃었다.

“저도요. 좋은 밤이었어요.”

문이 열리고, 냉기 섞인 새벽바람이 버스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먼저 내려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갔다가
갑자기 무언가 떠올렸다는 듯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 휴대폰을 가볍게 흔들었다.
카톡을 하자는 뜻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길로 걸어 들어갔고,
나는 첫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대합실 의자에 앉았다.
초겨울 새벽 공기는 차갑고, 마음은 이상하게 따뜻했다.

그때—
톡.

그에게서 정말 빠르게 첫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
방금까지 옆에 있던 건데도… 괜히 생각나네요.
조심히 내려가고 있어요?

그 짧은 문장이
내 마음 앞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아직 아무 의미도, 어떤 깊이도 없는 말인데
묘하게 따뜻해서 자꾸 눈길이 갔다.

나는 천천히 답장을 보냈다.

[나]
응, 기다리는 중이에요.
당신은 집에 잘 가고 있어요?

잠시 뒤, 또 메시지가 왔다.

[그]
네. 그런데 신기하네요.
이 시간에 우연히 옆에 앉은 사람이
이렇게 계속 생각날 줄은 몰랐어요.

새벽의 정적, 차가운 의자,
그리고 갑자기 밀려온 작은 설렘.

사랑이 흩어져 마음이 텅 빈 시기였던 나에게
이 한 줄의 메시지는
마치 오래 닫혀 있던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새 공기 같았다.

나는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조용히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런 시작도,
때로는 흩어진 마음을 잠시 붙들어주는구나.

그와의 첫 약속

며칠 뒤였다.
이틀을 꼬박 일에 묻혀 살다가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집에서 뒹굴거리던 늦은 오후,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익숙하지 않은 벨소리.
하지만 화면에 뜬 이름은 이미 내 마음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였다.

한순간, 아무 스케줄도 없던 하루가
조용히 긴장감으로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통화를 받았다.

“뭐해요? 목소리가 조금… 늘어져 있네요.”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냥… 쉬고 있어요.
이틀 동안 너무 바빠서요.”
내 말에도 그는 크게 놀라지 않고,
오히려 그 말이 반가운 듯 부드럽게 이어 말했다.

“내일은요?
만약 스케줄 없으면… 우리 볼까요?”

그 질문에 순간 숨이 걸렸다.
마음이 앞서 나가는 게 싫어서,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내일은… 언니 만나기로 했어요.”

그런데 그는 잠시 정적 뒤에
뜻밖의 제안을 했다.

“그러면 셋이서 드라이브 갈래요?
난 괜찮은데.”

그 말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는 오히려 더 당황했다.

언니와?
우리 셋이?

그 조합은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톤은 무리한 부탁이 아니라,
그냥 나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담긴 정직한 제안 같았다.

“음… 언니한테 말해볼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속에서는 이상한 파문이 번지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만나고 싶다는 뜻일까?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 걸까.

얼결에 약속이 잡혔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나는 한동안 휴대폰을 뒤집어 놓은 채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와의 만남이 어떤 시작이 될지
아직 알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흩어져버린 마음 한 조각이
조용히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여수로 향하는 길

그를 만나러 가기 전까지도
이 만남이 정말 자연스러운 흐름인지,
아니면 내가 너무 가볍게 허락한 약속인지
계속 마음속에서 생각이 부딪혔다.

하지만 약속 장소에 도착해 그의 차를 본 순간,
그저 조용한 호기심 하나만 남았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맞았다.

“언니분 먼저 앞자리 타세요.
제가 운전하면서 이야기 나누기 더 편할 거예요.”

그 말에,
나는 자연스럽게 뒷자리에 타게 되었다.
앞 좌석에 앉은 두 사람의 옆모습이
거울 속에 길게 비치고 있었다.

시동이 걸리고,
차 안에는 익숙한 듯 낯선 음악이 잔잔하게 깔렸다.
나는 엉겁결에 고개를 창문 쪽으로 살짝 기대고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도 않는데
그저… 자는 척을 하고 싶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 낯선 조합 속에서
내 마음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여수… 갈래요?”

그의 말에 언니가 놀란 듯 웃었다.

“여수요? 갑자기?”

“이왕 나온 김에… 멀리 가보는 것도 좋잖아요.
기분 전환도 되고.”

여수라니.
평소 같으면 망설였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길을 떠나는 일에 이유가 필요하지 않았다.

언니가 내 쪽으로 돌아보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갈까?

나는 의자에 몸을 더 깊게 묻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는 갑작스러운 여행을 떠났다.

누군가를 향해 흘러가던 마음이
더 이상 갈 곳을 잃어버린 시기였지만,
그날의 차 안은
마치 어딘가로 흘러갈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처럼
이상하게 가슴이 잔잔하게 뛰었다.

창밖으로 스쳐 가는 가로등 사이로
나는 눈을 감은 채
그의 목소리와 언니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내 마음속에서 무언가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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