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보이지 않는 거리

보이지 않는 거리

그는 부산으로 4일간 내려간다고 했다.
30년 넘게 이어온 단체 공연,
그에게는 삶의 한 부분이자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약속 같은 자리.

“여긴 너 데리고 갈 수 없어.
단체 일정이라 복잡해.”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야 한다고,
믿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하지만 막상 그가 떠나고 나니
집안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늘 그의 연락으로 시작되던 하루들이
조용해졌다.

그가 부산에서 보낸 첫날,
전화는 단 한 통.
단 2~3분의 짧은 통화였다.

“정신없어.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오늘은 조금 피곤해서… 내일 다시 전화할게.”

그의 목소리는 무겁고 지쳐 있었고
나는 그저 “응, 잘 쉬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 날도, 셋째 날도 마찬가지였다.
겨우 하루에 한 번.
그마저도 짧고 단조로운 통화.

“단체로 움직이니까 연락 잘 못해.”
“연습도 많아.”
“정말 너무 정신없어.”

나는 속으로 수많은 질문을 삼켰다.

정말 그렇게 바쁜 걸까?
5분도 여유가 없을 만큼?
왜…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질까.

하지만 내 입은 늘 같은 말만 내뱉었다.
“응, 괜찮아. 일해.”

그를 믿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아니, 내가 그에게 더 가까이 있고 싶어서
믿어야만 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삼일이 흘렀다.

문득 깨달았다.
그가 내 곁에 있을 때는
하루 종일 날 챙기고,
나 없이는 못 살 듯 굴던 그 사람이었는데—

부산에 가자마자
그의 세계는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처럼 느껴졌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지만
그 다정함 뒤에
나는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숨어 있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믿었다.

믿고 싶었다.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라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그 믿음의 틈 사이로
또 하나의 작은 균열이
조용히 흘러들기 시작하고 있었다는 걸
그때의 나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


사랑을 선택하는 마음

그래도 나는 애써 모든 불안을 외면했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멀게 느껴져도,
전화가 하루 한 번뿐이어도,
설명되지 않는 틈이 생겨도—

나는 보고 싶은 것만 보기로 했다.
사랑하고 싶은 대로 사랑하기로 했다.

그가 돌아오면
늘 그렇듯 나에게 전부를 내어주고,
내 손을 꼭 잡고,
내 하루를 챙기고,
사소한 것 하나에도 집중하는 그 사람이 될 거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 어딘가에서 조용히 울리던 경고음도
나는 들리지 않는 척했다.

그의 적극적인 사랑은
너무 뜨겁고, 너무 확실하고, 너무 다정해서
그것만으로도
나는 숨이 벅찰 만큼 행복했다.

그의 차가 내 집 앞에 서 있을 때,
그가 나를 보는 눈빛 속에서
모든 불안은 매번 산산조각 났다.

“미화야, 보고 싶었다.”
그 한마디면
내 흔들리던 마음은
다시 그의 품으로 곧장 달려갔다.

그가 내 손을 잡을 때,
그 따뜻한 손바닥의 감촉이
내 모든 걱정을 잠시라도 잊게 했다.

그래, 사랑받는 지금을 느끼자.
이 순간만큼은… 그의 것일 수 있으니까.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다.
지금의 사랑을 지키고 싶었고,
그가 주는 온기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붙잡고 싶었다.

그가 없을 때의 적막보다
그와 함께 있을 때의 뜨거움이
훨씬 더 강렬했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내 안에서 자꾸만 자라나는 의심을
조용히 눌러두고
그의 사랑만을 바라보기로 했다.

그건 어쩌면
사랑이라기보다
사랑을 믿고 싶은 마음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의 나는
그 차이를 구분할 만큼
차갑거나 현명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그의 전부가 되고 싶었고
그가 내게 보여주는 사랑 하나만 바라보고 싶었다.

그에게 끌린 마음,
그에게 중독된 감정…
그 모든 것을 놓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 있었다.
그래도 나는 애써 모든 의심을 외면했다.
그의 적극적인 사랑, 나를 향해 거침없이 내뱉던 말들,
틈만 나면 보여주던 따뜻함…
그 모든 순간들이 너무 달콤해서
그 어떤 불안도 그 맛을 빼앗아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없는 사흘 동안
나는 그의 목소리가 그리워
휴대폰 화면만 들여다보며 하루를 버텼지만
그래도… 그래도 나는 믿고 싶었다.
그의 바쁜 삶 속에서
내가 작은 숨결처럼 자리 잡아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달래며
“괜찮아, 그는 원래 성실한 사람이고
책임감이 강해서 일하는 동안엔
연락을 자주 하지 못하는 거야” 라며
내 마음을 스스로 다독였다.

그의 손길과 말투,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만 떠올리면
모든 의심들이 바람처럼 날아가 버렸다.
나는 그렇게,
그가 보여주는 사랑만을 붙잡고
다시금 그 안으로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 사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그 순간 나는 또 한 번 세상에 던져진 기분이었다.
엄마가 떠나고 7년 뒤,
마지막으로 나를 붙잡아주던 존재마저 사라져버린 것이다.

나는… 고아가 되었다.
입 밖으로 꺼내면 더 가슴을 찢는 말.
하지만 그 말이 너무도 분명한 현실이 되어
내 마음 깊숙한 곳을 무너뜨렸다.

그 슬픔은 설명할 수 없이 컸다.
누가 다가와 어깨를 감싸줘도
금방 무너져 버릴 것 같은 흔들리는 마음.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고
세상의 소리가 모두 멀리서 나는 것처럼
내 존재만 고립된 채 둥둥 떠다니는 날들이었다.

그런 나에게
그는 이상할 만큼 더 다정했다.
종교인이어서 그랬을까.
세상 어딘가에 ‘남아 있는 사람을 더 챙겨야 한다’는
그의 신념이 작동하는 듯했다.

“입맛 없어도, 조금이라도 먹어야 해. 그래야 버텨.”
그는 그렇게 말하며
맛있다던 식당들을 데리고 다녔다.

나는 아무 맛도 못 느꼈지만
그는 마치 나 대신 씹고 삼키는 것처럼
이곳저곳을 안내했다.
그가 내 팔을 gently 잡아 이끌 때마다
나는 잠깐이나마 공허함에서 빠져나오는 것 같았다.

그의 손길,
그의 시선,
그의 말투 하나하나가
‘너 혼자가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 다정함에
슬픔 속에서도 기댈 수 있었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아주 미세하게,
그의 온기 틈새에 한 줄기 그림자가 스며드는 느낌도
지워지지 않았다.
그가 유독 받지 않던 몇 사람의 전화,
그리고 이유를 대며 웃어 넘기던 태도들이
내 마음 한켠에서 가끔씩 미세하게 걸렸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슬픔을 견디느라
그 작은 의심마저 꾹 누르고 있었다.
그저…
내 곁에 있어주는 그가 고마워
모든 걸 눈감아 주고 싶었다.


기다림의 그림자

그는 여전히 내게 헌신적이었다.
눈을 맞추고 웃을 때면,
팔을 잡아 이끌며 챙겨줄 때면,
세상에 단 하나 남은 보호막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헌신과 동시에
그는 일주일에 이삼 일 정도는 꼭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

그럴 때면
“출장이야.”
“공연 준비가 좀 길어져.”
“오늘은 단체 활동 때문에 폰을 못 봤어.”

이유들은 늘 그럴듯했고
그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다정했지만,
그가 사라지는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점점 더 작은 사람이 되어갔다.

처음엔 자연스러운 일정이라 생각했다.
사람이 바쁘면 그럴 수도 있다고,
그와 함께한 시간이 진짜였으니 믿어도 된다고,
스스로를 달래며 이해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에게 먼저 연락하는 게 두려워졌다.

전화기를 들고도 숫자 하나를 누르지 못한 채
한참을 주저하다가
결국 화면을 꺼버리는 날들이 늘어났다.

혹시 귀찮아할까 봐,
혹시 바쁜데 내가 방해가 될까 봐,
혹시 받지 않는 전화가
또 하나의 ‘찔림’으로 남을까 봐…

격해진 마음이 들킬까 두렵고,
불안한 마음이 커질까 무서워
나는 점점 더 침묵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는 어느새
그가 연락할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가 먼저 다가오길,
그가 먼저 손 내밀길,
그가 먼저 말 걸길…

그렇게 나는
사랑을 누리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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