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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정 Sep 07. 2020

쉬는 날마다 오는 반갑지 않은 전화

'Private number'라는 이름이 뜬 나의 휴대폰이 울리고 있다.


받지도 않은 전화에 벌써부터 마음이 불편하다. 그 전화의 대부분은 병원에서 나의 오프(쉬는 날) 동안 근무를 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전화이기 때문이다. 예민하고 생각이 많은 나는 '받을까 말까', '원하는 날이 오늘일까 내일일까', '전화 거는 사람은 누구일까, 내가 거절하기 힘든 분일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대부분 전화를 받지 못한다. 어김없이 음성 메일이 곧 남겨진다. 그 음성 메일을 수차례 듣는다.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다시 전화를 달라는 것인지, 아니면 가능 여부에 상관없는 답신을 원하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병원은 나의 쉬는 날이 길면 길수록 여러 근무조가 가능한지 확인하고자 한다. 나는 어떤 추가 근무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거절을 해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 메시지를 남긴 이가 간절히 부탁하는 어조일 때 나의 고심은 깊어져만 간다.


최저임금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이곳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고, 파트타임 근무자이지만 대부분 풀타임 시간만큼 일하기 때문에 생활에는 큰 부족함이 없다. 오버타임(추가 근무) 리스트에 나의 이름을 올리지 않겠다고 나의 의사를 표시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선택이 아닌 듯 버젓이 내 이름이 그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수차례 다시 말했지만 정정이 되지 않았다. 일을 갓 시작했을 무렵에는 부탁을 거절하기 힘들어 일을 참 많이 했었다. 그러다 두 차례 몸살을 크게 앓고 '나도 이제 혈기 왕성한 20대가 아니구나'라고 느꼈다. 그 후로는 전화를 바로 받아 핑곗거리를 찾아 거절했다. 선약이 있다거나 무언가를 배우러 학교를 가야 한다는 등의 이유를 말했고, 실제로도 그런 경우가 많아 마음이 덜 불편했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 이런 핑계를 대기가 힘들어졌다. 그래서 요즘 나는 아예 답신을 하지 않는 선택을 자주 한다. 어떻게 보면 바로 전화를 받아 거절을 해 주는 것이 상대방의 일처리에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전화를 받으면 대부분 상대방이 여러 근무조 중에 한번 만이라도 와 달라고 부탁하기 때문에 거절을 하기가 힘들다. 다른 동료들처럼 그냥 "죄송합니다. 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몇 번 해 보았는데 그 말은 하기도 정말 힘들고, 하고 나면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전화를 받지 않는 방식으로 도망을 치고 있다. 다른 동료들은 웃으며 할 수 있는 그 말이 나는 왜 이리 내뱉기가 힘들단 말인가?



아마도 내 마음 깊은 곳에 상대방의 부탁을 거절한 차가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회신을 하지 않고도 훌훌 털고 쉬면 얼마나 좋을까? 나의 마음속 '착한 아이'는 답신을 하지 않고 있는 나를 또 한동안 괴롭힌다. 이래도 저래도 불편한 바보가 되고야 만다.


또 한 가지 아이러니한 것은 전화를 건 상대방의 태도를 받아들이는 나의 마음이다. 이곳은 한국처럼 '정(情)의 문화'가 없다. 그래서 부탁을 하는 사람보다는 사무적인 어투로 내가 근무를 원하는지 묻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워낙 다양한 인종이 함께 살다 보니 부탁을 하는 사람은 늘 하는 편이다. 부탁을 받는 경우에 왠지 모르게 잠시 동안 나의 능력을 인정받는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한다. 그래서 이 경우 거절이 참 힘든 것 같다. 반면에 사무적인 어투로 묻는 사람의 경우 나도 거절하기가 상대적으로 더 쉽다. 사람을 필요로 하는 긴박함의 정도는 어쩌면 두 경우 모두 똑같을 수 있다. 그저 전화 거는 스타일이나, 전화 거는 이의 '배려'에 대한 관점이 다를 가능성이 크다. 부탁을 하는 것이 더 배려한다고 생각하는 쪽과,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 더 큰 배려라고 여기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처음에는 말이라도 부탁을 하는 편이 더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나도 최근 들어서는 건조한 어투로 묻는 쪽이 오히려 나에게 부담을 덜 주는 것 같아 더 편안하다. 자신이 아무리 급하더라도 상대방이 원치 않을 경우 편하게 거절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상대방에 대한 진정한 배려'에 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착한 아이'로 보이고 싶은 내 모습과 자주 마주 앉는다. 다른 사람에게 착하게 보이고 싶고 타인이 나를 나쁘게 생각할까 봐 마음이 쓰이는 모습을 들여다본다. 내가 거절을 하더라도 타인은 내가 고민하는 만큼 나를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일깨운다. 또한 다음에는 피하지 않고 거절하는 연습을 해 보겠다고 다짐 해 보기도 한다.

 


쉬는 날마다 오는 반갑지 않은 전화 덕분에... 오늘도 이렇게 나를 한 뼘 더 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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