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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정 Oct 04. 2020

자존심 VS 자존감

이민 생활의 한 가지 숙제 :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 지기

'타인의 시선이나 평판에 너무 신경 쓰며 살지 않기'


나의 인생의 과제이자, 이민 생활을 하며 내게 던져진 하나의 큰 화두이다.


나의 다른 매거진에 글을 쓰는 동안 이곳에서 첫 직장을 구할 때 내려놓아야 하는 마음가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또한 내가 브런치에 이민 관련 글을 쓰게 된 계기를 고해성사(?) 하는 심정으로 써 본다.




대학 때 엄마와 이런 일이 있었다. 나는 몸이 아프신 엄마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아 최대한 '착한 딸'로 살았다. 당시 내가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을 '있는 집 친구'와 어울리면서 평소와 달리 흥청망청 쓴다며 야단을 치셨다. 야속하고 섭섭했다. 그래서 엄마가 챙겨주셨던 점심 한 끼를 안 먹겠다고 단호히 선언했었다. 엄마는 '얼어 죽을 놈의 자존심만 있다'라고 나에게 말씀하셨다.


대학시절 나의 그 단짝 친구는 부모님께 용돈을 두둑이 받는 편이었다. 당시 중학생 영, 수 과외를 주 6회 하던 나의 아르바이트 비용보다 그 친구의 용돈이 더 많았으니 말이다. 저녁에 동아리 모임에서 술자리가 있을 때면 늘 그 과외를 한 후 참석해야 했다. 엉덩이를 붙이는가 싶으면 집에 가야 했다. 빡빡한 간호학과의 수업일정과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내려면 밤새워 놀 무모한 용기를 내기도 힘들었다.


당시 나의 유일한 낙이 그 단짝 친구와 대학 구내식당이 아닌 밖에서 나름 '호사스러운 점심'을 사 먹는 일이었다. 호사스럽다고 해 봐야 1500원짜리 학식이 아닌 육, 칠원 하는 경양식 돈가스 정도였다. 그리고 내가 과외가 없는 날 그 친구와 생맥주를 마시며 시키고 싶은 안주를 실컷 시켜 먹는 것었다. 우리의 단골 호프집은 이름도 시원한 술의 신 '바카스'였다. 하지만 나는 엄마의 그 야속한 비난이 듣기 싫어 그 호사를 스스로 멈추었다. 오히려 그게 더 마음이 편했다. 겉으로는 엄마의 의견을 존중하는 듯 보였지만 엄마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그 얼어 죽을 놈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간호사 재교육 과정을 마친 후 약 7개월 정도 힘든 구직기간이 있었다. 내가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었다면, '외국에서 간호사 일을 구하면서 그 정도의 기간 걸릴 수도 있지' 하고 훌훌 털어버릴 수도 있었을 테다. 게다가 성실한 편인 나는 그 기간 동안 구직 활동도, 불어 공부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나보다 먼저 일을 구한 반 친구들이나 한국인 간호사들이 있었기 때문에 타인과의 비교에서 온 '힘든' 시간이 아니었나 한다. 한창 일을 구하고 있을 때 먼저 대학병원에 일을 구한 한 한국인 간호사가 전화를 걸어왔다.


"제가 다른 작은 병원에도 먼저 합격을 했는데 그 병원은 후져서 가기가 싫었어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가슴이 후벼 파이듯 아팠다. 나는 그녀가 포기한 '후진' 병원의 일자리도 구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축하해주며 전화를 끊었지만 그 후로 나는 그녀와의 만남이나 대화를 최대한 피했다. 나의 '알량한 자존심'이 만들어 낸 또 한 번의 힘든 시간이었다. 물론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 마당에 생면부지였던 사람들끼리 타국에서 만나 그 상황에서 섭섭한 감정이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었다면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나의 페이스대로 밀고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몬트리올은 한국인 간호사가 많지 않고 불어의 장벽이 있어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고 하면 다들 대단하게 여겨 주신다. 그런 점은 늘 감사히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도 어리바리해서 적응하기 바쁘기 때문에 솔직히 시간이 늘 빠듯하다. 처음에는 내게 만나자고 하시는 한국분들을 한 두 번은 만났었다. 왠지 모르겠으나 전화로 답을 드리겠다고 하면 꼭 만나고 싶다는 분들이 많았다. 만나기를 거절하면 이기주의적인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타인의 평판에 신경을 많이 쓰는 나는 밥을 얻어먹으면 그만큼의 정보 값을 했는지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던져 준 정보에 비해 상대가 느끼는 고마움은 적다는 생각이 들어 섭섭할 때도 많았다. 이민 관련 정보는 필요한 순간이 되어야 가슴에 와 닿는 특성이 있고, 상대방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따라 정보의 유용성이 달라지기 때문에 점점 상담을 하듯 세세히 물어봐야 했고 시간도 많이 들었다. 또한 타인의 삶에 너무 깊이 관여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물론 처음 경험하는 것들, 언어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한국인, 특히 간호사였던 분들과 정보 교환을 하게 된다. 내가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자존감이 높지 않은 편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그 만남들을 통해 이곳에서도 간호사로 '성공 아닌 성공'을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들 때가 많았다. 또한 먼저 이룬 사람의 길이 왠지 '진리'인 것 마냥 느껴져 꼭 그 길을 따라가야 할 것만 같을 때도 많았다. 내가 상처 받았던 것처럼 나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타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거나 다양성을 존중해 주지 못한 말들을 쏟아 냈을까 봐 조심스러웠다.


그렇게 점점 한국 간호사들과 만나는 자리는 어디든지 피하고 싶었다. 이러한 불편한 일들을 통해 우연히 브런치에 몬트리올 간호사 이민 관련 글을 쓰게 되었다. 처음에는 나의 민낯을 드러내는 것 같아 부끄러웠지만 글을 쓰며 오히려 내가 스스로 치유받는 느낌을 받는다. 조금씩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는 느낌 말이다. 그리고 글은 말보다 기분 상하지 않게 취사선택이 가능하기 때문에 내가 남기는 글이 도움이 되시는 분이 있다면 그 또한 나에게 보람된 일이다.


이곳에서 간호사를 준비하시는 분들은 나를 '차분히 나의 일을 해내는 사람'으로 표현해 주시곤 한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오리가 호수 위에 편히 떠 있는 것처럼 보일 뿐 수면 아래에서 발은 쉼 없이 젓고 있다. 나의 감정도 그 수면 아래 오리의 발처럼 발버둥 칠 때가 많다. 그래서 정보를 싣는 글이기 이전에 내가 겪은 시행착오에 관 감정을 솔직히 쓰려고 노력 중이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도 하듯이 간호사로 일하는 것은 시간의 차이일 뿐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민 생활은 좋은 병원에서 얼마나 빨리 간호사가 되느냐가 목적이 아니라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찾아 입고 행복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임을 나부터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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